‘슬럼프’를 딛고 ‘매향리의 봄’으로… 식지 않은 격정과 긴장의 7집 앨범 〈Good Luck!〉
누군가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애증이 교차한다”고. 혈육도 아닌 한 음악인에게 가지는 애증이란 무엇일까. 80년대 들불처럼 일어났던 노래운동의 정점에 서 있었고, 90년대 대중가요 순위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안치환(36). <내가 만일>이라는 감미로운 노래로 3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뒤 80년대 정서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이 그에게 꽂혔다. 어떤 이들은 변절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불법 테이프 속에 묻혀 있던 80년대 민중가요들을 한국 음반사의 한 귀퉁이에 오롯이 기록했다. 또 3년 뒤 문자에 갇혀 있는 김남주의 시들을 한장의 음반 안에서 선율로 다시 숨쉬게 했다. 30만장은커녕 5만장도 약속할 수 없는 음반들이었다. 핑클과 싸이가 대학 축제의 최고 손님이 된 2000년대, 대학로 라이브 무대에서 <철의 노동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안치환. 그는 80년대의 뜨거웠던 체열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로 민중가요를 배우기 시작한 이들에게, 떨치려야 떨칠 수 없는 피붙이 같은 존재다. 음악 같은 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어보이는 일상을 살면서도 안치환의 새 음반이 궁금해지는 건 그런 이유다.
6·15 정상회담을 보면서 만든 <동행>
“특별히 변신이나 변화를 의식한 음악적 고민은 없었어요. 내가 빚은 음악적 그릇 안에서 늘 이야기해왔으니까요.” 안씨의 말처럼 7집 앨범 〈Good Luck〉을 열면 <당당하게>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느꼈던 긴장과 격정이 배어나온다.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앨범의 머리에 나란히 실려 있는 노래 제목만 봐도 그렇다.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 <우물 안 개구리>, <슬럼프>. 그는 ‘어쩌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 알면서도 이 길 포기할 순 없었어’(<우물 안 개구리>), ‘더이상 꿈꾸지 않는 나를 견딜 수 없어 난, 벗어나고 싶어’(<슬럼프>) 자신을 향해 외친다. 왜 고민이 없었을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들면서 삶이 더 무거워지는 걸 느껴요. 노래를 쓸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 나의 모습, 내 안의 나에 대한 질문이 이번 음반의 밑그림이 됐습니다.” <자유>,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 정규앨범마다 한두곡씩 꾸준히 들어가 있던 고 김남주 시인의 시가 노래말에 한곡도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변화다. “김남주 시인의 시들은 어떤 노래보다 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곡 만들다가도 답답하면 언제나 김남주 시집을 펴들었으니까요.” 그는 이번 음반을 준비하면서 더이상 매달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김남주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제는 ‘내 꿈의 방향을’ 묻고 싶었던 생각에서다. 30대 중반, ‘사막에 마른 풀처럼 살아가다 보면 때론 지치고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어’(<슬럼프>)지는 그이지만 그래도 자신은 참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배들이 일궈놓은 노래운동의 텃밭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세대예요. 어찌보면 행운이었죠.” 전의를 상실한 시대와 맞서싸워야 하는 후배 음악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하기보다는 “네 길은 네가 가야 하는 거”라고 잘라 말한다. 여전히 분단현실이 있고, 미군이 민간인 마을을 위협하고, 수많은 노동자가 ‘공공의 적’으로 몰리는 이 시대에 왜 해야 할말이 없겠는가 그는 반문한다. 그는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는 노래로 후배들을 독려한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만든 통일노래 <동행>이나 그에게 매화 향기 대신 코끝 싸한 폭약냄새나는 유년 시절을 제공했던 고향 매향리의 암울한 역사를 노래에 새긴 <매향리의 봄>을 이번 앨범에 수록했다. ‘방송용’ 음악에 대한 딜레마
여전히 그의 노래말에는 ‘통일’과 ‘해방’과 ‘투쟁’이 등장하지만 그가 스스로 음악적 색깔을 찾는 계기로 삼는 음반은 <내가 만일>이 수록돼 있는 4집 앨범이다. “<내가 만일>을 수록하는 데 부끄러움은 없었습니다. 이 노래가 방송을 많이 타면서 결과적으로 음반도 많이 팔렸고요. 그렇지만 음반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이 노래 하나로 타협했다, 변절했다 비판하는 건 안타깝지요.” 이 앨범이 나왔을 때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90년대가 80년대 정신을 어떻게 껴안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며 “시장의 성과에 상관없이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상찬했다. 타협이란 시장의 성과가 부각되면서 사후적으로 내려진 판결이라는 측면도 있는 셈이다. 물론 <내가 만일>이 앨범 제작이 마무리된 뒤 추가됐다는 사실은 그를 타협의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방송에서 나올 수 있는 노래를 넣자’는 생각은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결국 시장에서의 성공은 그 자신에게 굴레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만일>로 단맛을 보고 난 뒤에 ‘방송용’과 ‘공연용’노래를 구분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5집까지 이런 부담이 이어지면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죠. 내가 왜 이러냐, 이러지 않아도 할 수 있는데, 비겁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만든 게 6집이었습니다.” 신보가 나온 뒤 방송홍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방송용’ 음악 스트레스에서는 벗어났다고 자부한다. 이번 음반 홍보를 위해서 3개월 계약으로 만난 스케줄 매니저는 환갑이 넘은 노인이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편하다.
방송용 음악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본 적이 있는 그인지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연예제작자협회와 방송사간의 싸움을 보는 감회도 남다르다. “음악산업에서 방송사가 무한권력을 휘두르니 제작사들은 방송용 가수들만 만들어대고, 또 이들은 노래 실력이 안 되니 방송 출연에 죽기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고, 서로 자기 무덤 판 셈이죠.” 그는 노래에 대한 애정부재, 철학부재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짚어본다. “주류음악에 음악은 사라지고 엔터테인먼트가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음악판 싸움에 정작 가수는 없고, 기획사와 방송사만 멱살잡고 있으니 참 어이가 없죠.”
“‘민중가수’를 남용하지 말라”
듬직한 후배 만나기 쉽지 않은 요즘,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이분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그의 뒷덜미에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민중가수, 저항가수라는 타이틀을 안치환씨는 부담스러워한다. “저항음악을 포기하고 대중가요로 투항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언론개혁문제는 최근 제 음악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냥 안치환의 음악을 하는 음악인이고 싶습니다.” 민중가수라는 말이 나올 때 그는 예민해진다. “빅토르 하라나 메르세데스 소사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에 몸바쳤던 가수들이 진정한 민중가수지요. 그렇게 영광스럽고 소중한 단어를 제게 붙이는 건 정말 함부로 남용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민중가수는 그에게 꿈이기도 하다. “제가 현역에서 물러났을 때 또는 죽어서라도 제 전체 작업을 평가하고 민중가수로 불러준다면 그때는 더없는 영광이겠지요.”
요즘 안씨는 자신의 밴드 자유와 함께 신곡 연습에 땀을 흘리고 있다. 오는 7월19일부터 22일까지 신보를 들고 관객과 만난다(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3272-2334). 이 무대에서 서정적인 발라드곡 <내 손을 잡아요>와 더불어 “훌륭한 노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기에” 재편곡해서 신보에 수록한 김민기씨의 <철망 앞에서>를 노래한다. 공연을 통해서 <내가 만일>의 팬들과 <철의 노동자>팬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민중가수, 저항가수라는 타이틀 보다는 그냥 안치환의 음악을 하는 음악인이고 싶습니다.”(강창광 기자)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들면서 삶이 더 무거워지는 걸 느껴요. 노래를 쓸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 나의 모습, 내 안의 나에 대한 질문이 이번 음반의 밑그림이 됐습니다.” <자유>,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 정규앨범마다 한두곡씩 꾸준히 들어가 있던 고 김남주 시인의 시가 노래말에 한곡도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변화다. “김남주 시인의 시들은 어떤 노래보다 제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곡 만들다가도 답답하면 언제나 김남주 시집을 펴들었으니까요.” 그는 이번 음반을 준비하면서 더이상 매달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김남주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제는 ‘내 꿈의 방향을’ 묻고 싶었던 생각에서다. 30대 중반, ‘사막에 마른 풀처럼 살아가다 보면 때론 지치고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어’(<슬럼프>)지는 그이지만 그래도 자신은 참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배들이 일궈놓은 노래운동의 텃밭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세대예요. 어찌보면 행운이었죠.” 전의를 상실한 시대와 맞서싸워야 하는 후배 음악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하기보다는 “네 길은 네가 가야 하는 거”라고 잘라 말한다. 여전히 분단현실이 있고, 미군이 민간인 마을을 위협하고, 수많은 노동자가 ‘공공의 적’으로 몰리는 이 시대에 왜 해야 할말이 없겠는가 그는 반문한다. 그는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는 노래로 후배들을 독려한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만든 통일노래 <동행>이나 그에게 매화 향기 대신 코끝 싸한 폭약냄새나는 유년 시절을 제공했던 고향 매향리의 암울한 역사를 노래에 새긴 <매향리의 봄>을 이번 앨범에 수록했다. ‘방송용’ 음악에 대한 딜레마

사진/ 안치환과 자유. 며칠 앞둔 공연 연습에 여념이 없다.(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