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흘러도 반가워라, 이희재의 <간판스타>와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재출간
짧은 역사의 한국 만화사를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평론가들이 뽑은…”이란 수식어가 붙는 걸작선이나, 주요 만화 관련 비평서에 꼭 들어가는 만화다. 앞으로도 이 만화가 이런 분류에서 빠지는 법은 없을 법하다. 이희재(49)씨의 <간판스타>와 오세영(46)씨의 <부자의 그림일기>다.
‘작가만화’ ‘예술만화’의 대명사
이 두 만화의 운명은 거의 비슷했다. 오세영과 이희재는 모두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대본소를 위주로 하는 이른바 ‘공장만화’ 또는 ‘대중만화’쪽에서 80년대가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고행석의 시대였다면, 그 반대편 ‘작가만화’ 또는 ‘예술만화’쪽에는 바로 오세영과 이희재가 있었다. 우직스럽게 혼자서 묵묵히 만화가 수업을 쌓아왔던 이 두 작가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다. 그리고 데뷔 몇년 안의 짧은 기간에 평생 자신들을 대표할 주요작을 일찌감치 선보였다. 80년대 처음 등장한 전문 만화잡지 <만화광장>과 <매주만화> <주간만화> 등 성인용 만화매체들이 이들의 요람이었다. 그저 그런 통속성이나 선정성이 아니라 확실히 어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담아낸 작품으로 이들 두 사람은 박흥용과 함께 80년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80년대 이들이 내놓은 최고의 작품들이 바로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다.
최근 이 두 작품이 다시 나왔다. ‘다시’라고는 하지만 그리 오래간만은 아니다. 95년 출판사 글논그림밭에서 나왔다가, 6년 만에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재출간됐다. 출판계에서 흔하디 흔한 재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95년 출간되긴 했어도 사실 그동안 이 두 만화는 시중에서 구할 길이 없었다. 대중적인 인기도 없고, 만화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찍지도 않았고 재고도 없어 서점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화를 논할 때면 늘 중요한 작품으로 언급되면서도 독자들은 볼 수가 없는 ‘명성’만 존재하는 작품과도 같았다. 그나마 95년 출판됐던 것도 만화전문출판사를 표방한 글논그림밭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글논그림밭(02-511-8648)은 한동안 경영문제로 거의 문을 닫은 상태로 지내오다 최근 다시 새 출발을 하면서 첫 번째 작품으로 다시 이 두권의 만화를 내놨다. 두권 모두 먼저 판에 비해 훨씬 시원해진 편집과 판형으로 보기 좋게 꾸며졌다. 사실 만화는 출판물 가운데서도 수명이 가장 짧은 편. 90년대 최고의 히트만화 가운데 하나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허영만의 <비트> 같은 유명한 작품도 벌써 대본소나 대여점, 만화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단한 성공작이 아니고서는 시장에서 3∼4년도 못 버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월수백종씩 쏟아져나오는 상황에서는 단명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80년대 작품으로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출판되는 만화로는 박수동의 <오성과 한음>, 윤승운의 <맹꽁이서당>, 고우영의 <삼국지> 등이 있지만 대부분 어린이용, 교육용 만화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성인용 만화로는 이 두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한국만화의 ‘신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을 상업성을 떠나 출판하고 싶은 만화 편집자의 심정도 한몫을 했다. 글논그림밭 조경숙 편집실장은 “고전이 끊기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듯, 좋은 만화도 안정적인 유통망 속에서 꾸준히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재출간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박재동 화백의 <목 긴 사나이> 등 80년∼90년대 만화 주요작들을 계속해서 다시 찍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선 시대착오적이지만…
다시 나온 두 작품을 지금 시대에 보는 맛은 그대로다. 두 작가가 모두 리얼리즘이란 화두 속에서 그려낸 우리 사회의 평범하고, 때론 그늘진, 늘 손해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전무한 실정이다보니 이들의 그림체는 더더욱 반갑다. 오세영씨야 지금도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그림에 큰 차이가 없지만, 이희재씨의 경우 그의 옛 그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던 터다. 나중에 발표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까지는 그래도 사실적인 선을 유지하던 이씨는 최근 <삼국지>나 전래동화 만화 등의 교육용 만화에 전념하면서 귀엽고 간단한 정말 ‘만화’풍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 <간판스타>를 보면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내던 30대 시절 젊은 만화가의 혈기와 패기가 담겨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간판스타>는 비정한 도시 속에서 하루하루 승냥이처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희재씨의 초기 단편을 모두 담고 있다. 청소부의 비극적인 삶을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낸 ‘새벽길’, 상처받은 소시민 가족의 이야기 ‘김종팔씨 가정 소사’, 이씨 작품치고는 의외로 결말이 유쾌한 ‘성질수난’ 등이 들어 있다.
이희재씨의 <간판스타>가 비슷비슷한 분량, 형식의 단편소설을 짜임새 있게 묶은 책이라면, 오세영씨의 <부자의 그림일기>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던 오씨의 여러 경향의 작품들을 모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 거의 완벽한 인체데생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선을 구축한 오씨의 대표작 ‘고샅을 지키는 아이’부터, 월북작가들의 단편을 만화로 재구성한 문학만화 ‘투계’, ‘복덕방’, 그리고 그 유명한 ‘부자의 그림일기’가 마지막에 들어 있다. ‘부자의 그림일기’는 가난한 집 딸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름은 부자인 초등학교 2학년 나부자의 그림일기와 만화가 양쪽에서 대비되는 형식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이제 이 두 작가가 이런 작품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역량의 고갈이 아니라 시장의 현실 때문이다. 이씨는 교육만화로 돌아섰고, 오씨는 발표 공간이 부족해 인터넷쪽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성인을 위한 만화잡지가 전멸한 상태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만화사에 기록할 작품은 당분간 나오지 못할 상황이다. 그래서 다시 나온 이 두권의 만화는 시장의 관점으로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만화 창작의 관점에서 보면 퇴행적이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반갑다.
만화가 왜 예술인지, 우리 만화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진짜 돈주고 사서 책장에 꽂아놓을 소장용 만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각권 9500원.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간판스타>에 수록된 단편 <민들레>의 한 장면.
최근 이 두 작품이 다시 나왔다. ‘다시’라고는 하지만 그리 오래간만은 아니다. 95년 출판사 글논그림밭에서 나왔다가, 6년 만에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재출간됐다. 출판계에서 흔하디 흔한 재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95년 출간되긴 했어도 사실 그동안 이 두 만화는 시중에서 구할 길이 없었다. 대중적인 인기도 없고, 만화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찍지도 않았고 재고도 없어 서점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화를 논할 때면 늘 중요한 작품으로 언급되면서도 독자들은 볼 수가 없는 ‘명성’만 존재하는 작품과도 같았다. 그나마 95년 출판됐던 것도 만화전문출판사를 표방한 글논그림밭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글논그림밭(02-511-8648)은 한동안 경영문제로 거의 문을 닫은 상태로 지내오다 최근 다시 새 출발을 하면서 첫 번째 작품으로 다시 이 두권의 만화를 내놨다. 두권 모두 먼저 판에 비해 훨씬 시원해진 편집과 판형으로 보기 좋게 꾸며졌다. 사실 만화는 출판물 가운데서도 수명이 가장 짧은 편. 90년대 최고의 히트만화 가운데 하나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허영만의 <비트> 같은 유명한 작품도 벌써 대본소나 대여점, 만화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단한 성공작이 아니고서는 시장에서 3∼4년도 못 버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월수백종씩 쏟아져나오는 상황에서는 단명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80년대 작품으로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출판되는 만화로는 박수동의 <오성과 한음>, 윤승운의 <맹꽁이서당>, 고우영의 <삼국지> 등이 있지만 대부분 어린이용, 교육용 만화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성인용 만화로는 이 두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한국만화의 ‘신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을 상업성을 떠나 출판하고 싶은 만화 편집자의 심정도 한몫을 했다. 글논그림밭 조경숙 편집실장은 “고전이 끊기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듯, 좋은 만화도 안정적인 유통망 속에서 꾸준히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재출간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박재동 화백의 <목 긴 사나이> 등 80년∼90년대 만화 주요작들을 계속해서 다시 찍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선 시대착오적이지만…

사진/ 이름만 ‘부자’인 가난한 집 아이 부자의 서글픈 학교생활 이야기를 그린 <부자의 그림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