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물론, 나치라는 악과 자유 프랑스라는 선의 구분이 분명하던 60여 년 전에 비해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 오늘날 분노의 대상이 불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에셀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호소한다. 주변을 둘러보라고. 그러면 분노의 대상이 보일 것이라고. 에셀이 말하는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참여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표와도 같은 앙가주망(참여)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인데, 실제로 사르트르는 에셀이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 같은 선배’였다. 이렇듯 분노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에셀이 보기에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분노와 참여를 차단하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그는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번역자와 행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도 젊은이들이 일단 지지 정당에 투표할 것과 시민단체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7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두 6개 장으로 이뤄진 이 소책자의 한 장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할애됐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외교관 여권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전쟁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했다. 창조의 저항, 저항의 창조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역설하면서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이어야 하며 그쪽에 더 희망이 있다고 에셀은 힘주어 말한다. 그는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선배 사르트르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기도 한 ‘평화적 봉기’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선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 bong@hani.co.kr *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 6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