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해외 진출을 하면서 ‘한국’을 강조하는 건 위험하다. 한국을 내세움으로써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엔터테인먼트사도 기업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굳이 국적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브랜드는 활동하는 국적뿐 아니라 아이돌 그룹이나 멤버보다 더 중요한 요소다. 미국이나 영국에도 보이밴드가 있지만 그들은 기획사보다 팀 이름이 맨 앞에 나오고, 가수이자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이 우선한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에서는 ‘어느 회사’ 소속인지가 우선한다. 문화산업의 발전 방식 차이이겠지만, 아시아적 맥락으로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케이팝에 관심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접하게 된 이가 꽤 많다. 재패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른 가수로 알다가 일본 방송에서 보고 한국 노래까지 듣게 된 경우다. 동방신기도 <원피스> 주제가를 통해 미국에 많이 알려졌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이나 미국은 재패니메이션을 통해 아시아적인 것을 학습했다. 재패니메이션의 영향력은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일일 드라마 같은 TV 애니메이션에서 나온다. 재패니메이션은 대중문화의 쾌락을 준다. 그런 점에서 케이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돌 팝은 아시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돌 그룹과 멤버들은 재패니메이션 속 캐릭터 같기도 하다. 피규어 등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을 모으는 것과 팬덤 활동과의 연관성도 작용한다.
파리 콘서트 관련 관객 인터뷰를 보면 재패니메이션을 통해 접한 이가 꽤 있더라. 이런 반응을 케이팝에 대한 유럽의 전반적인 관심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마니아’적인 것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게 소비로 이어졌다는 건 중요하다.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처럼 대량 소비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이번 파리 콘서트에 유럽 전역의 관객이 찾아온 것은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대중문화에 관심 갖고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반응을 보인 거라고 할 수도 있다.
아시아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이 불가능하다. ‘아시아는 하나다’는 아니지만 케이팝은 아시아 내 소비 경로를 거치며 조율된 음악이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케이팝에 대한 분석과 진단,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이승아 LACC 객원교수(왼쪽부터). 한겨레21 이종찬
차: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유럽에서 인기 있는 SM의 많은 곡이 유럽 작곡가들의 곡이라는 점이다. 유럽 작곡가 그룹인 ‘디자인뮤직’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만든 음악은 미국팝도 힙합도 아니다. 오히려 1980년대 유로댄스에 가깝다. 빌보드 차트에 드러나지 않는 음악 스타일이다. 그 음악으로 유럽에서 반응이 왔다는 점에 SM도 놀랐을 것이다.
최: 파리 콘서트에 대한 반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내에서 해외시장을 대하는 관점이 아시아와 미국, 유럽이 다르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를 바라볼 때 한국은 생산자이자 주체이고, 동아시아는 소비하는 대상으로서의 시장이다. 반면에 미국은 거꾸로다. 한국 대중문화의 지향은 미국이고 그곳이 1세계다. 유럽은 아시아와 미국에 대한 시선이 절반씩 있다. 제2세계다. 백인 중심의 유럽 사회 지향과 동시에 대중문화에서 우월하다는 의식이 혼재한다.
차: 파리 콘서트에 ‘인베이전’ 등 필요 이상으로 가치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개별적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고, 성과를 낼 것은 확실하다. 다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제대로 기록하고 관찰해 자료로 남겨야 하는데, 그 역할을 언론이나 평론가 모두 못한다는 거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이 벌어질 텐데, 어떤 방식으로든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된 피드백이나 비판 등이 필요하다.
제작사, 가수, 대중 힘 균형 이뤄야
최: 해외 진출에서 엔터테인먼트사 내부 문제의 개선은 중요하다. 물론 외국 기업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제기하며 소비하는 것과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건 다르다.
이: 미국 등 해외에 진출할 때 계약이나 노동 등의 문제는 예민하고 중요한 사안이다.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엔터테인먼트사의 계약 얘기를 하면 대부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말한다. 잘사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계약 등의 문제로 방송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설명하기조차 힘들다.
최: 짧은 시간에 급성장해야 했던 우리의 특성이 존재한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아시아에서 이 문제를 대하는 관점과 다르기도 하다. 아시아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근면하고 성실한 것이고 국내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가수들을 ‘국위선양하고 열심히 돈 버는 애들’로 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노동착취다.
차: 계약 문제나 산업의 선진성 등은 개별 엔터테인먼트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부딪히며 배워야 한다.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과 막상 현지에서 보고 느끼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엔터테인먼트사와 아이돌 그룹 사이의 계약이나 미성년자 노동 등은 법으로 개선돼야 하는 사항이다.
지난 6월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에서 유럽의 소녀팬들이 한글이 적힌 손팻말을 치켜들며 열광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제작사와 가수, 대중이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국내 엔터테인먼트사는 제작사가 비대해져 가수와 대중은 제작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모양새다. 가수들도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대중도 소비자 권리를 찾지 않는다. 대중문화의 주인은 대중인데, 정작 대중은 엔터테인먼트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최: 해외 진출은 보통 국내 시장에 한계가 왔을 때 두드러진다. 2~3년 동안 지속된 아이돌 전성기가 지금 다시 한계에 왔다고 볼 수 있다. 이걸 타계해야 하는 기업적 상황이 있기 때문에 해외시장 등을 통한 재생산을 이어간다. 그런 식의 흐름이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다. 엔터테인먼트사의 처지에서는 전략적으로 진출했든 자구책으로 진출했든 그 과정을 통해 계속 배우고 문제를 개선해나갈 것이다. 개선되지 않으면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차: 여러 나라에서 공동 투자를 하고 다양한 국적의 감독, 배우들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앞으로 음악산업 역시 ‘어디 돈으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시점이 올 거다. 다국적 자본으로 만든 영화가 오히려 자본에서 자유로워져 메시지를 더 명확히 전달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음악산업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사의 지사가 해외에 있고 동시에 외국의 대기업과 손잡고 제작한다면 지금과 또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
이: 팬덤 위주의 아이돌 팝이 한국 대중음악의 대표성을 띠는 건 안타깝다. 얼마 전 한국 인디밴드들이 ‘서울소닉’으로 뭉쳐 북미 투어를 하며 로스앤젤레스(LA)에서 공연을 했다. JYJ도 LA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학교 학생들 중에 콘서트 두 곳을 다녀온 친구들이 있는데, 양쪽 다 굉장히 좋은 반응이 왔다. 서울소닉 공연의 경우 미국 메이저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차: 인디신에서 케이팝으로 묶이는 걸 싫어하는 이가 많지만, 그래도 인디 음악이 케이팝을 전략적으로 써먹을 수도 있다. 일본의 칼리지밴드도 해외 음반 매장에서는 제이팝 카테고리에 있지 않나.
산업 넘어 예술적 성취 추구해야
이: 미국 시카고대학의 한 교수가 제이팝에 대해 쓴 글에서 “제이는 결국 아무 뜻도 아니다. 그저 아티스트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 뿐, 일반 팝과 차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케이팝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케이팝에서 ‘케이’가 뭘까. 꼭 ‘코리아’일 필요는 없다. 제작 과정 등은 한국에 발을 딛고 있고 언어도 한국어를 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문화적·예술적 측면이다. 케이팝에는 산업만 있고 예술은 없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막 쓰는 건 분명히 문제다.
차: SM 콘서트에 대한 반응이나 해외 팬덤 형성은 21세기적 변화이고, 내용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뭔가가 오고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다. 10년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염려스러운 건 내용 면에서 예술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주요 엔터테인먼트사는 예술적 성취보다 산업적 성공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모든 것이 성과 위주로 가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데 그치게 된다. 이번에 특히 그런 점이 드러났다.
최: 창조적 관점에서 생산·소비·공유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만들어내고 창작되는 것이 없다면 해외 진출 창구도 금세 사라질지 모른다.
안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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