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문화’ 극복에 팔 걷어부친 ‘인권대사 박경서’의 철학
그는 육십살에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회(WCC)의 아시아 국장으로 18년간을 지내다가 불쑥 한국으로 왔다. 조국을 위해 열심히 뛰기 위해서. 지금 그는 인권대사로 활동중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자리다.
부평에서 목격한 폭력의 현장
그럼 대통령과의 핫라인이 있으시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직언도 하고 그러시겠군요. “네, 그렇지요.” 아무리 직언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해도 대통령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얼지’ 않나요? “하하, 네, 전 안 그렇습니다.” 연구실 여기저기 놓인 사진 속의 그를 보니 과연 그럴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세계의 지도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한결같이 자연스럽다. 독일 대통령 바이체크와 다정한 모습,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한잔 나누는 모습, 영국 옥스퍼드 부총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 버마의 아웅산 수지와 대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그는 높은 사람 앞에 가도 떨리지 않는 게 자기의 천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래도 단련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보기엔. 아무나 안 떨리나. 거물들하고 자꾸 악수를 해봐야지. 하긴 그가 그 고위급들과 나눈 얘기가 모두 ‘도움’에 관한 것이니 그의 자세가 자연스럽고 부드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 WCC에서 일하면서 그는 31개국 아시아 국가에 대한 원조와 인권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한국에 온 지 18개월. 올해 2월에 인권대사로 임명된 그가 할 일은 무지 많다. “지난 번 부평사건 때 제가 직접 현장에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알아보려고요.”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폭력의 문화를 새삼 절감하였다. 특히 경찰이나 전경들의 교육 중에 인권교육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곧 있으면 탄생할 국가인권위원회의 주요기능 중에 인권교육분야를 강화시키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데모는 평화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동시에 경찰에게 폭력이 가지고 있는 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38년 동안의 군사문화를 통해 폭력의 합리화, 남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다반사로 여겨왔지요. 장기적으로 평화, 화해, 인권의 문화를 펼쳐야 합니다. 곳곳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폭력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책무이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하는 게 인권대사인 저의 책무 중 하나입니다.” 민간대사인 그의 할 일은 또 있다. “정부기구와 엔지오간의 비판적 협조관계를 어떻게 구축하느냐 그것이지요. 정부는 엔지오의 신선하고 프레시한 비전을 듣고 엔지오는 정부의 어려운 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잘 융합된 문화형성이 나의 목표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가 5년마다 유엔에서 받게 되어 있는 A규약 심사에 관한 리포트를 지오와 엔지오가 힘을 합해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유엔 인권위원회 참석. 국제회의 중 인권에 관한 회의 참석, 국가홍보사절로 일하기 등이 그의 시간표를 꽉 채우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권신장을 위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과 같은 단체들과의 협조도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북한 관련 문제. 원조와 인권, 남북평화정착이 바로 앞에 있다. “북한 인권은 왜 다루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인권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북한인권문제는 각론으로 다룰 게 아니라 평화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을 국제무대로 나오게 해서 그들 스스로가 인권에 대해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6·15 문서는 7200만 배달민족의 문서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새천년민주당의 문서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원한을 씻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모두의 문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동북아 평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동북아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로 직결된다. WCC에 있는 동안 북한에 다녀온 횟수만 해도 스무번이 넘는다. 최근 전국을 돌면서 그는 족히 600여회가 넘게 강연을 해왔다. 그가 평화에 대하여, 대북지원에 대하여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왜 퍼주느냐”, 친북 발언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이 있다. “나가 해병대 31기 장교 출신이오!” 이런 저런 내용을 아무리 조리있게 설명해도 갸우뚱하던 보수 인사들이 “그랬어! 그럼 허튼 말은 아니것구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 젊어서 군대갔을 때 많이 두드려맞기도 했지만 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아시아를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그는 성공회 대학의 석좌교수이기도 하다. 70년대 중반 크리스찬 아카데미 반공법사건으로 곤욕을 치르던 시절에도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였다. 지난 학기에 아시아의 문화를 개설해서 강의했다.
“세계화를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세계화라는 것은 잘 나고 큰 나라만 알기가 아니라, 가난하고 작은 소수민족 영성의 가치도 헤아릴 줄 아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아시아를 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아시아를 모르면 누가 압니까? 소수민족들의 식민지 시절 고뇌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극복해왔는가, 크메르 노동자는 어떻게 우리나라까지 와서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는가, 그 뿌리의 원인을 우리 젊은이들이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이 퍽 좋아해요” 하면서 그가 더 좋아하는 모습니다.
“서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옛날에 서울대학에서는 그냥 남의 글을 베껴서 가르친 것 같아요. 지금은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실을 가르치니 학생들한테 그대로 다가가고 마음이 통하는 것 아니냐 하는 고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강의가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인생고백이라고 박 대사는 정리한다.
그는 순천이 고향이지만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왔다. 혜화동에 살았는데 명륜동 사는 친구가 놀러 오라길래 서울역까지 버스타고 가서 다시 명륜동 가기를 서너달 하다가 마침내 혜화동 옆이 명륜동이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스스로 ‘촌놈’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진짜 여전히 촌스럽다. 그는 육십 평생 한잔의 커피도 입에 대본 적이 없다. 커피만 안 마시는 게 아니다. 보리차, 옥수수차, 녹차, 우롱차, 둥글레차도 안 마신다. 그는 삼다수, 진로생수, 좋은 샘물. 그것도 안 마신다. 그는 오직 날마다 끓여서 식힌 수돗물, 즉 맹물을 마신다.
그의 사전에 “차나 한잔”은 없다
“차나 한잔”이라는 말은 그의 사전에 없다. 차를 꼭 마셔야 한다면 시늉만 한다.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나. 부인 오영옥 여사가 설명한다.
“제네바 시절 모든 사람들이 저이 더러 ‘해피 박’이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머가 넘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해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시간도 철저히, 주위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매일매일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사는 남편에게 ‘마음에 들기’란 어지간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이가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 날이 되면 베란다 청소에서, 자동차 세차, 아 휴… 바쁘지요.” 박 대사보다 더욱 인상 좋은 부인이 웃으면서 말한다. 서양사를 공부한 부인은 공항 대기실 같은 데서 남편이 일찍 자느라 못 본 영화, 연속극 얘기를 해주기를 좋아한다. “둘 중에 하나만 보면 되지 뭐.” 남편의 지론이다.
인권대사로서의 덕목은? 세계를 두루 둘러보았을 시선이 직시하며 대답한다.
“정직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고뇌를 전달해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하지요.”
그는 순수한 물의 에너지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 위를 도도히 흘러갈 물 위에 그의 이름을 쓰고 있기도 하다.
권은정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직언도 하고 그러시겠군요. “네, 그렇지요.” 아무리 직언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해도 대통령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얼지’ 않나요? “하하, 네, 전 안 그렇습니다.” 연구실 여기저기 놓인 사진 속의 그를 보니 과연 그럴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세계의 지도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한결같이 자연스럽다. 독일 대통령 바이체크와 다정한 모습,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한잔 나누는 모습, 영국 옥스퍼드 부총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 버마의 아웅산 수지와 대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그는 높은 사람 앞에 가도 떨리지 않는 게 자기의 천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래도 단련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보기엔. 아무나 안 떨리나. 거물들하고 자꾸 악수를 해봐야지. 하긴 그가 그 고위급들과 나눈 얘기가 모두 ‘도움’에 관한 것이니 그의 자세가 자연스럽고 부드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 WCC에서 일하면서 그는 31개국 아시아 국가에 대한 원조와 인권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한국에 온 지 18개월. 올해 2월에 인권대사로 임명된 그가 할 일은 무지 많다. “지난 번 부평사건 때 제가 직접 현장에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알아보려고요.”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폭력의 문화를 새삼 절감하였다. 특히 경찰이나 전경들의 교육 중에 인권교육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는 곧 있으면 탄생할 국가인권위원회의 주요기능 중에 인권교육분야를 강화시키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데모는 평화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동시에 경찰에게 폭력이 가지고 있는 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38년 동안의 군사문화를 통해 폭력의 합리화, 남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다반사로 여겨왔지요. 장기적으로 평화, 화해, 인권의 문화를 펼쳐야 합니다. 곳곳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폭력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책무이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하는 게 인권대사인 저의 책무 중 하나입니다.” 민간대사인 그의 할 일은 또 있다. “정부기구와 엔지오간의 비판적 협조관계를 어떻게 구축하느냐 그것이지요. 정부는 엔지오의 신선하고 프레시한 비전을 듣고 엔지오는 정부의 어려운 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잘 융합된 문화형성이 나의 목표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가 5년마다 유엔에서 받게 되어 있는 A규약 심사에 관한 리포트를 지오와 엔지오가 힘을 합해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유엔 인권위원회 참석. 국제회의 중 인권에 관한 회의 참석, 국가홍보사절로 일하기 등이 그의 시간표를 꽉 채우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권신장을 위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과 같은 단체들과의 협조도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북한 관련 문제. 원조와 인권, 남북평화정착이 바로 앞에 있다. “북한 인권은 왜 다루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인권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북한인권문제는 각론으로 다룰 게 아니라 평화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을 국제무대로 나오게 해서 그들 스스로가 인권에 대해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6·15 문서는 7200만 배달민족의 문서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새천년민주당의 문서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원한을 씻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모두의 문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동북아 평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동북아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로 직결된다. WCC에 있는 동안 북한에 다녀온 횟수만 해도 스무번이 넘는다. 최근 전국을 돌면서 그는 족히 600여회가 넘게 강연을 해왔다. 그가 평화에 대하여, 대북지원에 대하여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왜 퍼주느냐”, 친북 발언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이 있다. “나가 해병대 31기 장교 출신이오!” 이런 저런 내용을 아무리 조리있게 설명해도 갸우뚱하던 보수 인사들이 “그랬어! 그럼 허튼 말은 아니것구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 젊어서 군대갔을 때 많이 두드려맞기도 했지만 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아시아를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사진/ 전 독일 대통령 바이츠체커(왼쪽)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