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대체복무제 실시’ 대만 민주화의 만만찮은 폭과 깊이를 확인하다
지난 7월8일부터 14일까지 대만을 다녀왔다. 올해 초 <한겨레21>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실태를 보도한 뒤 이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는데,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인 대만이 지난해에 도입한 대체복무제도를 시찰하는 참관단의 일원으로서였다.
대체복무제, 기독교 반발은 없었다
우리를 초청한 단체는 대만촉진화평문교기금회로서, 대만의 체대역(替代役: 대체복무제도) 실시의 주역인 치엔시치에(簡錫) 입법위원(국회의원)은 이 단체의 집행장이기도 했다. 우리의 공식일정은 도착 다음날인 9일 아침 기자간담회로 시작되었다. 장소는 의원회관 귀빈실. 여의도 의사당 귀빈실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귀빈실로서는 초라하다고 할 만큼 소박했다. 의원회관의 정문에는 한가한 표정의 경찰 한명만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귀빈실 창문 너머는 바로 택시들이 지나다니는 한길이었다. 대만을 찾기 전에는 막연히 그곳도 우리 뺨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선입견은 첫날부터 조금씩 깨어지고 있었다.
다소 형식적인 간담회를 마치고 우리는 치엔 의원과 대체복무제도의 이론적 기수로 활약한 중앙연구원의 첸신민(陳新民) 교수로부터 이 제도의 도입과정과 내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첸신민 교수는 1970년대 후반 독일 뮌헨대학에 유학할 때 독일의 대체복무제도를 보면서 자신의 조국에도 이런 제도를 실시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첸신민 교수 자신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 그는 자기도 징역을 살 뻔했지만 다행히(?) 눈이 나빠서 병역면제를 받고 유학을 갈 수 있었다면서, 친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의 졸병생활이 일본군 잔재가 남아 있어 몹시 힘들다는 사실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첸신민 교수는 대만의 경우 입법 당시 여호와의 증인으로 병역을 거부하여 수감중인 사람은 한국의 1500여명에 비해 훨씬 적은 60여명으로, 여호와의 증인 문제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첸 교수는 대만사회가 종교적 문제로부터 대체복무제도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과 국방력 개편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고, 여호와의 증인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천정배 의원 등이 추진하던 공청회가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하며 떠난 우리 참관단은 대만에서 대체복무안이 추진될 때 기독교계의 반발은 없었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대답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총본부를 방문했을 때도 설명은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대만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테리 리이놀즈씨는 이 법안이 포괄적인 하나의 인권법안으로서 제안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 역시 찬성했다고 말했다. 병무청장, 군 장성 출신이 아니었다
10일과 11일 이틀간의 일정은 우리나라의 병무청격인 역정사(役政司)가 책임을 졌다. 뜻밖에도 역정사는 수도인 타이베이에 있지도 않았고, 또 국방부 산하기관이 아니라 내정부(內政部) 소속이었다. 역정사가 내정부 소속인 까닭은 청년들이 입대 이후에는 군인 신분이 되어 국방부 관할로 넘어가지만, 아직 민간인 신분으로 신체검사를 받아 현역과 대체역, 면제 등으로 나누어지는 과정은 내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정사 사장인 충타이리(鍾台利)는 자신이 군 장성 출신이 아닌 민간인 관료로는 처음으로 역정사 사장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역정사가 국방부 소속이 아닌 점, 또 역정사 사장이 군 출신이 아닌 민간관료였던 점은 대체복무제도가 행정부 내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역정사에서의 공식 브리핑을 한 사람은 여성 과장이었다. 우리 직제로 한다면 국장쯤되는 분이었는데 병무청에 해당하는 기관의 공식 브리핑을 여성이 담당한다는 사실이 좀 신기했다. 뒤에 창포야(張博雅) 내정부장을 접견했을 때도 충 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았다. 우아하면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내정부장은 대만에 장관급 이상의 여성이 부총통 이하 자신을 포함해서 8명이라고 말했다. 공직사회에의 권위주의의 타파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보며 대체복무제도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충타이리 사장은 우리를 데리고 대체복무를 하는 젊은이들, 이곳 용어로 역남(役男)들이 근무하는 현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대만 중부 타이중시(台中市)에 자리잡은 노인의 집이였다. 모두 367명의 노인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는 모두 15명의 역남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대체복무자들의 근무현황을 소개할 때 노인의 집 원장의 입은 정말 반쯤 찢어져 있었다. 이 제도의 실시로 자신이 원장으로 있으면서 늘 바라오던 것들이 한꺼번에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체복무자들 중에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3명, 영양사가 2명, 재활의학 전공자 1명 등으로, 몇년을 두고 정부당국에 인원보강을 요구하던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리치료사나 재활의학 전공자를 상주직원으로 채용하고, 이런 인원을 한꺼번에 배치하자면 사회복지예산을 얼마나 늘려야 할까? 대만 역시 60만의 대군을 운용해 온 병영국가였다. 대만의 인구는 우리의 절반가량인 2100만명. 그 인구로 우리와 맞먹는 병력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사회복지에 돌아갈 예산은 형편없었을 것이다. 대체복무제도의 실시로 혜택을 받는 사람은 현재 대체복무인원 1만여명 중 40여명인 종교적 이유의 신청자만이 아니었다. 사회복지시설에 젊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수천명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사회복지수준의 획기적인 향상을 가져오고 있었다.
‘군기 빠진’ 역남들
노인의 집에서 처음 만난 역남들의 모습에서 놀라운 것은 그들의 ‘군기 빠진’ 자세였다. 우리의 병무청장이라면 퇴역 육군 중장이 주로 보임되는 고위직이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높은 사람이 부대를 방문하여 나를 지목해서 이야기를 건넨다면 부동자세로 목이 터져라 관등성명을 외쳐야 한다. 그런데 이곳의 역남들은 역정사 사장이 물어보아도 건들건들한 태도에 웃어가며 대답을 했다. 이 엄청난 군기 빠짐, 그것은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이고, 동생의 모습이고, 후배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심신장애자들의 교육시설과 시각장애자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여기서도 역남들은 비슷한 분위기였다. 특히 시각장애자학교의 경우는 근무하는 역남의 수가 3명에 불과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보고내용의 절반이 이들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담은 슬라이드쇼로 되어 있었다. 보고를 맡은 이 학교의 총무주임은 사진 속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가며 보고를 진행했다. 그 순간 “아, 방위나 공익근무요원들에게도 이름이 있는 것이구나” 하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라는 시구가 생각났다. 대만의 군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자살률 때문에 악명이 높았는데, 치엔 의원이 대체복무자들 중에서 자살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던 말도 떠올랐다.
다음날 방문한 타이중 현 소방국에는 148명의 역남이 산하 20여개 소방서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10명이 보고회에 참석하였는데, 대규모 인원이 배치되어 있어서인지, 이들은 다른 사회복지시설에 배치된 역남들에 비해서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이들은 보고가 진행되는 동안 프로젝터의 스크린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한국의 사병들에 비해 군기가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소방서에 대체근무자를 배치한다는 발상은 한국에서도 의무소방대문제로 논란이 야기된 적이 있었다. 우리 참관단에는 군경순직자 유가족회의 어머니 두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분들은 국내에서 의무소방대에 징집된 청년을 배치하는 문제에 반대하신 분들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의무소방대 증설문제가 홍제동 화재 당시 소방관들이 순직한 직후에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징집자들을 화재진화 현장에 투입한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유가족회의 이애련 회장과 최영금 선생 등이 이 문제를 지적했고, 소방당국과 역정사 관계자들은 대체복무자들이 화재진화 업무에는 투입되지 않고 소방차 관리, 수질 검사, 상황근무, 구출된 인원의 후송 등 보조업무만 담당한다고 답변했다.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만난 것은 타이중시 인근의 동세(東勢)생활재건센터에서였다. 이곳에는 5명의 대체복무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타이중시는 1999년 9월 큰 지진이 발생해 구석구석 사회복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체복무자들 상당수가 타이중 일대에 배치되었는데, 행정당국은 이들의 활동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종교적 이유로 대체복무를 신청한 사람들은 4주간의 신병군사훈련 자체가 면제되기 때문에 복무기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7개월 긴 2년9개월을 복무해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서 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대체복무자의 한 사람은 자기 형은 4년간 징역을 살았는데, 거기에 비하면 2년9개월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밝게 웃었다.
대체복무제도의 어두운 면들
대체복무제도의 주무기관인 역정사에서는 당연히 이 제도의 밝은 면만을 보여주려 했지만,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어두운 면과 개선해야 할 점을 숨기지 않았다. 내정부의 부장 이하 간부들은 이 제도가 위로부터의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음을 강조했으나, 시민단체 관계자들, 특히 치엔 의원과 당시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추추이쳉(邱垂正)은 단호히 이런 해석을 거부했다. 물론 치엔 의원도 이 제도가 자기가 처음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역설할 때 기대했던 것에 비해 엄청나게 빨리 시행되었고, 이는 내정부와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이 이 제도의 장점을 빨리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치엔 의원은 1996년 처음으로 이 제도를 추진할 때만 해도 병영국가의 안보논리가 군이나 국방부뿐 아니라 사회전체에 퍼져 있었다고 했다. 치엔 의원은 이 제도의 도입으로 큰 혜택을 보게 될 대학생들조차 이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주요 대학의 학생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국회의원인 자신이 학생동아리를 찾아다니며 간부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1997년에 국방부가 군정실안(軍精實案), 즉 병력감축안을 채택하여 병력을 60만명에서 45만명으로 감축하면서, 군부 역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에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점점 장비가 현대화하여 인공위성으로 개미새끼 한 마리의 이동까지 다 감시하는 마당에 60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군 지도자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엔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추추이쳉을 비롯하여 많은 시민운동가들은 일부 제도의 왜곡과 공평성의 문제를 입을 모아 지적했다. 대체복무제도를 처음 구상할 때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구상하였지만, 내정부 등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소방역, 경찰역, 교정역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큰 문제였다. 우리 참관단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경찰역이나 교정역은 소방역에 비해 근무조건이 훨씬 열악하고, 사회역의 경우도 노인들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 같은 일을 맡은 사람들은 차라리 현역으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는 것이다. 또 돈있고 이른바 ‘백’있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대체복무에서 일이 편한 학교 경비 등으로 쏠리는 현상도 병역의무의 형평성과 관련하여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복무자들의 처우가 현역에 미치지 못하는 점도 문제로 들었다. 이들이 받는 봉급은 현역 신병 수준으로 사병들이 대만 달러로 평균 9천달러(약 34만원)를받는데 비해 대체복무자들은 7천달러(약 26만원)밖에는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우리 사병들의 봉급은 병장이 1만500원. 한국 육군 병장의 2년 반 봉급을 다 모아도 겨우 대체복무자 한달 월급이 안 되는 것이었다.
대만 외성인들의 자각
대만은 여러모로 우리와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유교적 전통, 일본의 식민지 경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한 국가테러, 분단으로 인한 병영국가화, 우리의 지역감정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외성인(外省人)과 본성인(本省人)의 대립, 그리고 민주화. 그러나 일주일간의 짧은 관찰이었지만 이런 외형적 유사점을 한 꺼풀 들추면 또 우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오랜 기간 대만의 집권세력이었던 국민당의 주류는 본토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이다. 영화 <비정성시>의 배경이 된 2·28사건 등 백색테러 때문에 대만의 본성인들 중 다수는 국민당 통치가 오히려 일제의 식민지 통치보다 가혹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식민지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대만은 일본교과서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이다. 아니, 소극적인 정도가 아니라 일본 우익교과서 제작의 배후 인물인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善紀)가 그린 <대만론>(臺灣論)이란 만화는 반대도 만만찮았지만 큰 히트를 쳤다. 대체복무제도라는 선진적인 제도가 실시되는 대만에서 교련과목은 선택과목이긴 하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아직도 실시중이다. 우리의 시민운동이나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통일을 바라는 소리가 지배적이지만, 대만에서는 현상유지 내지는 대만의 분리독립론이 오히려 주류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옛 지배세력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외형상 우리가 먼저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우리 사회는 정권은 빼앗겼지만 사회의 헤게모니는 놓치지 않은 수구세력이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데 대만의 외성인들은 본토로 돌아갈 꿈이 깨지면서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고, 그 과정에서 본지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민주화가 투쟁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면, 대만의 민주화에는 투쟁과 더불어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옛 지배세력의 자기변신이 있었다. 대만이 아시아에서 제일 민주화된 나라는 아닐지라도 제일 먼저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라는 왕쉐펑(王雪峰) 의원의 지적처럼 그 영광의 절반은 수구반동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자기를 맞추려는 보수세력의 것이 아닐까?
대만의 국민당사 앞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아들로 총통을 지내다가 오래 전에 죽은 장징궈(蔣經國)가 “여러분, 지난 한해(민진당 통치 아래서) 몹시 힘드셨지요?”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장제스와 달리 장징궈는 민주화 세력에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군사독재 시절보다 오히려 더 패악스러워진 수구세력의 반동을 보면서 대만 민주화의 만만찮은 폭과 깊이를 생각해본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노인의 집’에서 노인을 운동시키는 대체복무자.(이창은)
다소 형식적인 간담회를 마치고 우리는 치엔 의원과 대체복무제도의 이론적 기수로 활약한 중앙연구원의 첸신민(陳新民) 교수로부터 이 제도의 도입과정과 내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첸신민 교수는 1970년대 후반 독일 뮌헨대학에 유학할 때 독일의 대체복무제도를 보면서 자신의 조국에도 이런 제도를 실시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첸신민 교수 자신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 그는 자기도 징역을 살 뻔했지만 다행히(?) 눈이 나빠서 병역면제를 받고 유학을 갈 수 있었다면서, 친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의 졸병생활이 일본군 잔재가 남아 있어 몹시 힘들다는 사실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첸신민 교수는 대만의 경우 입법 당시 여호와의 증인으로 병역을 거부하여 수감중인 사람은 한국의 1500여명에 비해 훨씬 적은 60여명으로, 여호와의 증인 문제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첸 교수는 대만사회가 종교적 문제로부터 대체복무제도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과 국방력 개편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고, 여호와의 증인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천정배 의원 등이 추진하던 공청회가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하며 떠난 우리 참관단은 대만에서 대체복무안이 추진될 때 기독교계의 반발은 없었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대답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총본부를 방문했을 때도 설명은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대만의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테리 리이놀즈씨는 이 법안이 포괄적인 하나의 인권법안으로서 제안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 역시 찬성했다고 말했다. 병무청장, 군 장성 출신이 아니었다

사진/ 응급처치 시범을 보이는 모습.(이창은)

사진/ 창보야 내정부 장관(오른쪽)과 대체복무제도 실시의 주역인 치엔시치에 입법의원(가운데)과 함께 환담하는 필자.(이창은)

사진/ 대체복무제도의 이론적 기수로 활약한 중앙연구원의 첸신민 교수.(이창은)

사진/ 대만의 군 인권단체 관계자들과 함께한 한국 참관단.(이창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