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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야기도 목넘김도 질주하네

정유정의 <7년의 밤>과 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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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12 11:40 수정 : 2011-05-1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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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월요일이었다. 햇살이 항구에 쌓인 컨테이너 더미들 사이로 여리게 새어나오는 이른 아침이었다. 주말에 만나는 남자에게 일주일간의 이별을 고하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 나와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주춤주춤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 꿈결 같은 시간에 정유정의 <7년의 밤>(은행나무 펴냄)을 읽었다.

책을 손에 든 이유는 두 가지다.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칼럼에 ‘찢어먹을’ 책장을 찾으려고. 목적은 두 개였으나 하나의 답만 얻을 수 있었다. 실패한 것부터 말하자면 살인과 복수란 두 개의 레일을 타고 내달리는 이야기 가운데 한갓지게 맛있는 걸 먹는 장면은 끼어들 수 없었다는 것. 오옷, 하고 얄팍한 마음으로 붙잡을 뻔했던 문장이라면 이 정도. “문득 배가 고팠다. 나는 부엌으로 나갔다.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찬장 문을 열어놓고 한참 고민했다. 뭘 꺼내려 했더라.” 주인공은 뭘 꺼내먹지도 못하고 냄비만 태워먹었다. 그리고 ‘부엌’‘냄비’ ‘먹는다’ 따위의 단어는 더 이상 이야기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찢어먹을 책장’을 찾진 못했지만 책장을 찢어가며 먹을 음식은 찾았다! 이 짧은 칼럼에서 이건 좀 이따 이야기하기로….)

이야기를 읽으려던 두 가지 목적 중 나머지 하나에 대한 답변은 강렬했다. 소설은 대문을 열자마자 ‘세령호 재앙’의 파편을 보여주며 사람을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자기 아내마저 죽여 강에 내던지고,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한 마을 주민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과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그 공을 받아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을 한 한 남자, 딸의 복수를 꿈꾸며 7년간 칼을 간 ‘교정 전문’ 치과 의사 한 남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파멸과 생의 의지와 복수, 진실과 그 이면이 뒤범벅된 채 끝나지 않는 밤들이 있었다.

기차에서 프롤로그와 이야기의 앞부분을 읽다 깜박 잠이 들었다. 1시간쯤 자고 깼을 때, 정신은 꿈과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고 발 디딘 곳이 서울인지 부산인지 소설의 배경인 세령마을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눈두덩에 채 떨어지지 않은 잠을 떨쳐내고 여차저차 출근, 그리고 퇴근 뒤에 책 읽기는 이어졌다. 심장을 쫄깃하게 조여오는 이야기 탓인지 빈집에 홀로 들어가자니 마음이 서늘했다. 질주하는 이야기가 조정하는 대로 온 마음을 낚이지 않으려면 적당히 집중되지 않는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다. 카페로 갔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더 벌렁댈 거 같아 레몬 소다를 시켰다. 크~ 그런데 이게 웬일, 부글거리며 목구멍을 쏘아대는 탄산의 경쾌한 박자와 휘몰아치며 내달리는 이야기의 리듬이 기묘하게 맞아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책을 덮은 수요일 늦은 밤까지, 책 속의 문장들은 콜라·맥주 같은 부글거리는 음료에 섞여 들어갔다. 그중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꼽으라면 역시 탄산음료의 대명사, 콜라.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콸콸 부은 다음 튀어오르는 기포들을 얼굴에 맞아가며 목이 따끔거리는 걸 참으며 벌컥벌컥 마시는! 중독과 자극의 음료는 마지막 장에 도달할 때까지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 이야기를 닮아 있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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