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퇴근한 남편을 현관에서 맞는 아내가 말한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내가 못 살아~.” 이것이 다른 집의 모습. 늦은 밤 퇴근한 남편이 현관에 들어와 와잎을 보고 말한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내가 못 살아~.” 이것이 우리 집의 모습. 밖에서 마시고 들어온 남편보다 더 취해 있는 와잎을 확인하는 일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다. 하긴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가는 나를 두고 애주가 와잎의 음주신공을 익히 아는 친구 녀석들이 “4차 가냐”며 놀려대는 형국이니. 그도 그럴 것이 실제 3차까지 먹고 집에 가서 달리고 있던 와잎이랑 플러스 1차를 한 경험이 왕왕 있는 나로선 “그저 웃지요~”라고 할밖에. 귀가마저 플러스 1차인 내 인생에 건배!
와잎의 음주신공은 처음에는 은밀했다.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연애가 오래될수록 둘이서 만나는 횟수보다 여럿이 함께 만나는 경우가 많아지자, 자연스레 와잎의 음주신공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운동권과는 담 쌓고 살던 와잎도 술자리에서만은 급진주의자이자 전체주의자로 변했다. 와잎은 급진적으로 술자리를 몰아갔다. 제사는 용납되지 않았다. 술을 받으면 먹고, 먹었으면 받아야 했다. 예외는 없었다. “부어라~ 마셔라!” 주신(이자 폐인)으로 가는 디오니소스의 길이었다. 또한 내가 한 잔 먹으면 다른 사람도 반드시 한 잔을 먹어야 했다. 니잔 내잔이 없었다. 전체로 하나되는 음주 대동단결주의. 이른바 음주 전체주의였다. 위아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못 본 잔은 카운팅되지 않았다. 극우독재가 따로 없었다. 와잎은 “이번 거 먹으면 세 잔 남았다”고 내 친구들에게 통보하곤 했다. 결국 두 발로 걸어들어온 친구 녀석들이 등에 업혀 실려나가는 것으로 술자리는 끝나기 일쑤. 이와 같은 와잎의 급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음주독재에 (구토와 떡실신으로) 신음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지하로 잠적했다. 다시 우리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나는 어쩌라고~).
이렇게 쓰고 나니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진다. 칼럼 연재로 자신의 사생활이 연이어 털리자 “그렇게 와잎 팔아 글 쓰니까 좋으냐?”며 수위조절의 압박을 가했던 와잎이 아니던가. 정론직필을 위해선 ‘취재원’ 보호(?) 차원의 특단 조처가 필요했다. 와잎이 좋아하는 참치로 회유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퇴근 뒤 자고 있는 아들 녀석을 유모차에 태우고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방배동 카페골목 참치집 ‘청어람’을 찾았다. 정통 일식집 분위기가 정갈했다. ‘스페셜’로 주문을 했다. 와잎 배려차 소맥 기본도 잊지 않았다(흡족한 표정의 와잎. 술꾼들이란~). 뱃살과 아가미살 부위 위주로 회가 나왔다. 와잎이 먼저 시식을 하시고, 나도 한 점 맛을 보았다. 경이였다. 서걱서걱한 일반 참치집의 육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와잎과 난 일본 도쿄에 갔을 때 먹어본 “입에서 사르르 녹는 궁극의 맛“이라며 즐거워했다(서민들이란~).
마침 가는 날이 장날. 매주 수요일 저녁 8시에 진행한다는 참치회 뜨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큰 도마 위에는 어른 반만한 크기의 반토막 참치가 입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실장님(참치집의 주방장은 대개 실장님으로 불린다)이 참치 볼살과 머릿살을 잘라 내왔다. 마치 꽃등심 같았다.
와잎이 말했다. “나 좀 오늘 마셔도 되지?” “…그럼~(웬일? 언제는 나한테 물어보고 마셨냐?).” 와잎은 급진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운전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간신히 와잎의 전체주의적 책동을 물리칠 수 있었다. 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참치를 느끼며, 햇빛 찬란한 봄날 바람에 벚꽃이 스러지는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흩날리는 봄날처럼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좀 쓸쓸했다. 불콰해진 얼굴로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와잎을 보며 다짐했다. 그래,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술을 마셔줄게. 그게 ‘스페셜’한 나의 운명이니까(그 대신 칼럼은 계속 써도 되지?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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