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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70년째 탐구 대상, <이방인> 주인공의 도덕성은 냉담함인가 극단의 정직인가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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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5 15:28 수정 : 2011-05-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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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책세상 펴냄·1994)은 김화영 선생이 1987년에 번역해서 출간한 번역본의 3판 1쇄 버전이다. 그 책을 1995년에 읽은 것 같다. 최근 선생께서 20여 년 만에 새 번역본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신간 <이방인>(민음사 펴냄·2011)을 구입했다. 몇 페이지만 비교해봐도 어휘나 구문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 강렬한 줄거리는 그대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슬퍼하기는커녕 한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누는 타입의 청년인 뫼르소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휴양지에서 한 아랍 청년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이야기다.

다들 배운 대로 소설의 3요소는 ‘주제·구성·문체’다. 간단한 이야기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필 윤희중 같은 타입의 인물이 하필 무진이라는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에 하필 그와 같은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방인>(책세상 펴냄. 1994)
캐릭터 기념관이라는 게 있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지하생활자의 수기>), 멜빌의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그리고 카뮈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이상(李箱)이 뫼르소보다 6년 먼저 탄생시킨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한 인물이 소설의 거의 전부다. <이방인>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게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 구성 자체가 그렇다. 작가는 1부에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자행한 사건을 소개하고, 2부에서 그를 이해·오해하기 위한 법정을 열어 독자와 토론을 벌인다.

토론의 구도는 이렇다. 그는 사건 1(모친상)을 겪었고, 사건 2(살인)를 저질렀다. 이 두 사건의 관계를 조합하는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 1은 2의 근거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냉담할 정도의 인간이니 무고한 아랍인도 죽인 것이다. 둘째, 1과 2는 별개다. 그가 무정한 아들이건 말건 그것은 사법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문제이고, 그의 (비도덕 혹은 반도덕이 아니라) 무도덕은 오히려 우리의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의의를 갖는다. 셋째, 1과 2는 은밀하게 매개돼 있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 등장하는 저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나 인간 뫼르소의 핵심이자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신비인 이것은 가려져 있다.

첫 번째 시각은 바로 검사와 배심원의 논리 그대로다. 카뮈는 이런 통념적인 시각에 맞서 두 번째 시각을 제기하려 한 것 같다. 뫼르소의 무도덕은 정직함의 어떤 극단적인 양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다음날에는 애인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토록 불편한가?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 뫼르소만의 것인가? 그는 단지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늘 하는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뮈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사르트르의 <벽> 서평, 전집 18) 이런 매력적인 단호함으로 카뮈가 (특히 미국판 서문에서) 두 번째 시각에 힘을 싣고 있지만, 또 이것이 작품의 윤리적 급진성을 잘 추려내는 독법이겠지만,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세 번째 시각으로 봐야 할 뫼르소의 심연은 여전히 깊어서 그것은 백인백색의 탐구 대상이다. 이 예외적인 내면의 매력 덕분에 이 소설이 70년째 읽히고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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