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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깜악귀가 꾸민 세번째 연극

살인을 주제로 난무하는 상상력… 복고 지향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하이’한 새 앨범 <머더스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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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5 14:44 수정 : 2011-05-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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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가 있었다. 어느 날 순식간에 그는 인터넷의 ‘대세’가 됐다. 숱한 합성과 패러디가 만들어졌고, 인터넷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공중파 TV 프로그램에도 무난하게 진입했다. 뒤이어 그의 퍼포먼스뿐 아니라 음악도 얘기되기 시작했다. 그는 산울림과 송골매의 아이였다.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복고의 정서는 산울림과 송골매를 비롯한 한국의 옛 음악들에서 가져왔고, ‘복고’를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눈뜨고 코베인' 리더인 깜악귀(오른쪽에서 두 번째).

장기하 ‘위대한 탄생’의 멘토

그리고, 깜악귀가 있었다. 길게 얘기하면, 지금의 장기하란 가수가 만들어지기까지엔 깜악귀란 존재가 있었다. ‘눈뜨고 코베인’(이하 ‘눈코’)이란 다소 키치적 이름의 밴드를 이끌고 있던 깜악귀는 밴드의 드러머로 장기하를 영입해 주입식(?) 교육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같은 펑키한 음악을 좋아하던 장기하에게 날마다 산울림과 송골매, 그리고 신중현 같은 한국 록의 고전들을 들려주며 이게 밴드의 지향점이라는 사실을 주입했다. 반복학습 끝에 장기하는 그 음악들에서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하고 그 매력을 자신의 음악에 대입하려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장기하의 위대한 탄생의 시작이었고, 결과적으로 깜악귀는 장기하의 음악적 멘토가 되었다.

특정 학교를 굳이 꺼내서 얘기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움직임이 만들어진 사실까지 외면할 순 없다. 서울대 얘기다. 깜악귀와 장기하의 인연 역시 둘의 모교인 서울대에서 시작됐다. 당시 서울대에선 일종의 음악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 움직임의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꽤 많은 수의 서울대 출신 (인디) 음악인들로 나타났다. ‘눈코’와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와 ‘9와 숫자들’, 그리고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생각의 여름’이라는 믿음직한 포크 음악인까지 이들은 ‘서울대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음악적으로도 이리저리 얽혀 있는 관계다. 그 가운데서도 ‘눈코’의 행보는 독특했다.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음악인이 당시 교내에 머물러 있었다면, ‘눈코’는 일찌감치 홍익대 앞으로 진출했다. 홍대 앞에서도 독특했다. 밴드는 홍대 로컬 신(scene)에서 1970년대 말 캠퍼스 밴드 같은 음악을 들려줬다. 그들에게선 ‘산울림’의 음악이 들렸고 ‘활주로’의 음악이 들렸다. 지금이야 복고니 레트로니 하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눈코’가 첫 EP <파는 물건>을 발표한 2003년쯤엔 그리 흔한 게 아니었다. 더욱이 국외도 아니고 국내의 록 음악을 자양분으로 삼아 그 정서를 품고 있는 건 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눈코’와 깜악귀는 그렇게 서울대 쑥고개와 홍대 앞을 오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깊고 넓어진 상상력의 내러티브

‘눈코’는 깜악귀의 지휘 아래 굴러가는 팀이다. ‘목말라’나 ‘슬프니’같이 키치적 이름 덕분에 유명해진 멤버들도 있지만, 모든 음악의 지휘권은 깜악귀가 쥐고 있다. 좀 과하게 말해 ‘깜악귀와 그 악단’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래서 음악에는 전적으로 깜악귀의 취향이 들어간다. 그 취향은 앞서 여러 번 언급한 한국 록의 고전들이다. ‘눈코’란 밴드 이름과 각 멤버들이 쓰는 가명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한국 인디 신이 형성된 초창기의 키치(혹은 엽기) 밴드처럼 오해받기도 했지만, 들려주는 음악만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사이키델릭과 펑크, 하드록을 가지고 만들어낸 음악들은 눈여겨볼 만했고, 실제와 상상 사이를 오가며 써내려간 구어체 가사는 그들만의 개성으로 자리했다. “음악을 하는데도 근육 같은 게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깜악귀의 말처럼 첫 EP <파는 물건>부터 시작해 2장의 정규 앨범을 내는 동안 ‘눈코’는 점점 더 발전했다. 세련돼졌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 것이다. 초창기의 아마추어리즘을 더 좋아한 이들에겐 마뜩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세 번째 앨범 <머더스 하이>.

그리고 얼마 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머더스 하이>(Murder’s High). 깜악귀의 말대로 이 앨범에는 좀더 미세하게 근육이 발달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혹은 귀)에 띄는 점은 이들이 갈수록 듣기 좋은 팝송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깜악귀의 보컬은 산울림의 김창훈이 연상되는 음치성 보컬이지만, 그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노래는 쉽게 귀에 들어온다. 데뷔 앨범 제목이기도 한 <팝 투 더 피플>(Pop to the People)이 이 앨범에서 드디어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당신 발 밑>이나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와 같은 노래들은 ‘인민의 팝’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또한 깜악귀를 규정하는 큰 축인, 상상력의 내러티브는 이제 하나의 콘셉트로 앨범을 만들 정도로 더 넓고 깊어졌다. 지난 앨범 <테일스>(Tales)에서 ‘아빠를 살해하고 벽장에 감춘 엄마, 고속도로에 사는 원숭이, 우주 최고의 섹시 금붕어, 그리고 아들에게 지구를 지키지 말 것을 유언하는 슈퍼 히어로 아버지’에 관한 뻥을 들려줬다면, 이 앨범에선 짐짓 무게를 잡고 앨범 제목 그대로 ‘살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다. 과대망상증 과학자의 대량학살을 노래한 <일렉트릭 빔>을 비롯해 노래 곳곳에서 난무하는 온갖 상상력은 이 앨범을 기묘한 콘셉트 앨범처럼 만든다. 이 앨범의 노래들은 단순히 노래라는 차원을 넘어 연극처럼 보인다. 실제로 깜악귀는 노래 안에서 대사를 치고 상황극을 만들며 모노드라마를 만들기도 한다. 상상을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상상을 노래로 표현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게 잘 만들어진 노래라면 더욱 말이다.

독특하게 잘 하는 음악인

예전의 깜악귀가 ‘독특한’ 음악인이었다면, 지금의 깜악귀는 독특하게 ‘잘’ 하는 음악인이다. <머더스 하이>란 제목은 달리기를 하는 이들이 한계점을 넘는 순간 느끼는 환희를 뜻하는 ‘Runners’ High’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표현은 지금 새 앨범을 발표한 ‘눈코’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노래와 가사, 모두 ‘눈코’s High’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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