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인간의 삶을 재조직한 SNS 혁명 그래도 거기서 논점을 취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해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하다. 하나는 “미디어란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미디어를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라 부른다. 여기에 대립하는 입장은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through)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 안에(in) 구현된 메시지”라고 말한다. 마셜 매클루언은 이를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간략한 명제로 요약한다. 한마디로 대중이 SNS를 한다는 것이, ‘그것으로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논쟁이 있은 지 얼마 뒤, 공교롭게도 튀니지·이집트·리비아에서 차례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촉매가 된 것은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SNS였다. 물론 SNS가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을 게다. 무엇보다 이 나라들에는 장기 집권을 해온 독재정권이 있었고, 그 정권 아래 피폐해진 국민의 삶이 있었고, 좌절한 국민의 입을 막는 검열과 탄압의 장치가 있었다. 혁명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SNS가 없었다면 그 혁명이 촉발되거나 확산될 수 없었으리라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도구’란 그저 도구가 아니다. 어떤 도구든지, 사회 속에 들어오면 인간의 삶 자체를 재조직하게 된다. 가령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안에 신통한 물건 하나를 그러잡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들이 짜내는 망 속에 입장해 그 세계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한다. 아랍의 독재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SNS가 알게 모르게 국민이 사는 방식을 재조직해 더 이상 기존 통치가 유지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자국에 SNS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스북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애초에 페이스북은 미국 하버드대학 성원들 사이의 (다소 배타적인) 친교 수단으로 출발했다. 그래서인지 지인이나 친우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데 아직도 페이스북이 적격이다. 물론 페이스북으로도 전혀 모르던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경우에도 페이스북은 여전히 ‘사적’ 공간으로 남는다. ‘파워 블로거’나 ‘파워 트위터러’라는 말은 있어도, ‘파워 페이스부커’라는 말을 듣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일 게다. 팔로는 ‘구독’ 관계 맺기? 내 경험에 따르면, 트위터는 페이스북보다 공적 성격이 훨씬 더 강하다.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지원하고, 호텔의 드레스코드를 비판하고,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등 공적 의제를 설정하는 것은 어느새 트위터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공적 사안에 관해 유명인들이 트위터에 남긴 멘트는 곧바로 신문 지면으로 옮겨진다. 이는 트위터를 통한 소통이 생각보다 수평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언젠가 본 연구에 따르면, 트위터를 통한 소통의 상당 부분이 파워 트위터러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 경우 누군가를 ‘팔로’(Follow)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교’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매체를 ‘구독’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종종 개념의 혼동이 일어난다. 트위터가 ‘사적 친교 관계를 맺는 매체’이자 동시에 ‘공적 여론을 형성하는 매체’라는 이중성을 갖다 보니, 전자의 규범을 그대로 후자에 옮겨놓는 범주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팔로를 했으니 당신도 나를 팔로해야 한다.’ 가끔 이 주장은 이론적 논증을 동반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평등성이라는 트위터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트위터를 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두뇌 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적 두뇌에 접속함을 뜻한다. 물론 140자의 한계 내에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단상, 촌평, 혹은 간단한 문답뿐이기에 트위터로 호흡이 긴 사유를 주고받기란 힘들다. 대신 모바일이라는 트위터의 사용 환경은 그것을 ‘실시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감각기관으로 만들어준다. 가령 ‘독설닷컴’에서 버스나 전철에 물건을 놓고 내렸다는 팔로워(Follower)의 멘션을 리트윗(RT·Retweet)해주면, 수만 동료 팔로워들의 눈과 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곤 한다. 집합적 두뇌는 ‘타임라인’ 형태로 존재한다. 타임라인에는 내가 팔로하는 여러 사람들의 단상이 뒤섞여 흘러간다. 팔로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타임라인은 더욱더 정신이 없어진다. 이 혼란에 대처하는 데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사용된다. 타임라인의 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은 ‘폭트’(폭풍트윗)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언팔’(Unfollow·트위터 구독을 취소하는 것)해 타임라인에 시각적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반면에 타임라인의 정보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은 ‘리스트’를 활용해 타임라인에 흐르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아마 세 번째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수백, 수천 명을 팔로하는 이들에게 ‘도대체 타임라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물었다. 올라온 대답은 ‘무위자연’, 즉 “굳이 관리하지 않고 수많은 멘트들이 타임라인 위로 그냥 자유로이 흘러가게 내버려둔다”는 것이었다. 이는 백남준이 참여했던 예술운동(‘플럭서스’) 같기도 하고,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하던 기법(‘의식의 흐름’) 같기도 하다. 타임라인을 읽는 방식도 ‘다다’(Dada)스럽다. 계정을 열었을 때 우연히 가장 위에 올라온 것들만 읽는단다. RT로 힘을 얻는 복제·확산의 멘트들 미디어 시대에 권력은 복제된다. 복제가 거듭될수록 그것의 힘은 더욱더 커진다. 일반 트위터러가 날리는 멘트의 힘은 결국 RT 횟수가 결정하게 된다. RT가 많이 되는 멘트들은 대개 그럴 만한 이유를 가졌다. 정확한 통찰, 적절한 수사, 충격적 효과, 반전의 미학 등. 물론 RT가 많이 된다고 항상 질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논문의 중요성은 종종 인용 횟수로 평가되나, 인용 횟수가 논문의 우수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비판당하려고 자주 인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자신을 많이 복제해 널리 확산시키고 싶어하는 게 유전자의 본능이다. 문화에도 유전자(gene)처럼 복제 기능을 가진 ‘밈’(Meme)이라는 유전자가 있다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은유)이 있다. 트위터의 멘트는 이 밈을 닮았다. 하지만 본능이 항상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SNS에도 당연히 이성 없이 복제의 본능만 가진 멘트가 난무한다. 클릭 횟수로 광고를 파는 인터넷 신문들이 종종 복제 본능만 가진 기사를 싣는 것처럼, SNS에도 복제 본능만 가진 글이 있다. 그런 글들이 너무나 자주 RT를 통해 제 목적을 이룬다. 전형적 방식은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로 바꿔놓는 것, 가령 가수와 배우의 이혼에 대해 사석에서나 할 수 있을 멘트를 슬쩍 공적 관심사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때 확산 범위가 사석으로 제한돼 있던 유전자는 졸지에 복제 범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여기에는 어떤 생물학적 책략이 있다.
어느 과학자의 좌충우돌 트위터 실험기 기존 SNS가 간과한 욕망을 채워주는 공간, 대중의 날생각을 담은 ‘집단 대뇌’는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하루 만에 트위터 팔로어를 100명 늘리는 방법은 뭘까요?” 일요일 나른한 오전, 트위터에 올린 이 한마디에 수십 개 멘션이 날아왔다. 하나같이 ‘맞팔 잘 해주는 사람 100명을 팔로우하면 단번에 해결된다’는 식이었다. 하루 만에 팔로어 100명을 늘리는 방법은? 다른 방법은 뭐 없을까? 가설을 하나 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팔로어’(Follower)가 무지 많은 이른바 ‘허브’(Hub)에게 유익한 정보를 보내면, 그는 자신의 팔로어들에게도 유익하다고 판단되면 리트윗(Retweet)을 하리라. 그러면 그들 중 내 트윗을 읽고 ‘이 사람의 정보를 직접 받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리라. 10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진 사람에게 보내면 그들 중 0.1%만이라도 나를 팔로잉(Following)해주면, 단번에 100명이 늘어날 것이다. 일요일 나른한 오후, 이 가설을 곧바로 테스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팔로어 수가 당시 350만 명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트윗(Tweet)을 날렸다. “버락, 대한민국 서울의 홍대 입구에는 라비린토스라는 곱창집이 있는데, 그곳에선 ‘팔로어 수×10원’어치 할인을 해줘요. 당신은 팔로어 수가 350만 명이니, 그곳에서 3500만원어치 공짜로 곱창을 먹을 수 있어요. 다음에 한국에 방문하면 라비린토스를 꼭 방문하세요.” 물론 영어로! 그리고 곧바로 이외수 선생(당시 팔로어 수 10만 명!)에게도 트윗을 보냈다. “이외수 선생님, 덕분에 항상 BBQ 치킨 맛있게 먹고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BBQ 치킨은 서초동에 있는 교대점이 제일 맛있다는 거:-)” 당시 BBQ 치킨 홍보를 열심히 하시던 그의 말초신경을 BBQ로 자극하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은 당시 내 팔로어들에게 생중계됐고, 그들은 모두 내 트위터 실험을 유쾌하게 엿볼 수 있었다.
크로스 2의 필자 진중권 문화평론가(위)와 정재승 교수는 트위터로 활발히 대중과 소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