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만5천달러를 들여 제작된 리처드 세라의 <기운 호>(Tilted Arc)는 소송 끝에 결국 철거됐다. 철판 표면에 시민들이 무수한 낙서를 남겼다.
미국의 미니멀리스트 조각가 리처드 세라(1939~)가 1981년 뉴욕 연방 플라자에 거대한 조각을 설치했다. 1979년에 의뢰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결과인데, 제목은 <기운 호>(Tilted Arc)였다.
제이콥 재비츠 미연방 빌딩 앞 광장을 위한 공공미술품 사업을 추진한 주체는, 미국 총무청(GSA)의 ‘건축 속 예술’(Art-in-Architecture) 프로그램이었고, 세라를 추천한 쪽은 미국립예술기금 전문위원들이었다(참고로, 1963년 도입된 ‘건축 속 예술’은 건축비의 0.5%를 기탁받아 공공미술을 제작·설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스스로 제 구조를 지탱하는 단일 재질의 철 조각을 이러저런 형태로 변주해온 세라는, 주변 환경을 특별한 변수로 받아들여 ‘장소 특정적 미술’을 시도했다. 표면에만 녹이 스는 내후성 강판(Cor-ten Steel)을 별다른 가공 없이 연극적 형태로 제시하는 그는, 3.7m 높이의 강판을 공장에서 배출할 때 일정 압력을 가해 살짝 휘어지고 뒤틀어지도록 했고, 그것을 36.6m 길이에서 끊어 광장에 세웠다. 호 형태로 완만히 구부러진 강판은 다소 뒤틀어진 덕에 내각을 향해 기울어짐에 따라, 별다른 건축 부재의 도움 없이 안정성을 유지하며 홀로 섰다.
세라는 작품의 요체를 이렇게 해설했다 “관객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신과 그 움직임을 인지하게 된다. 관객이 이동함에 따라 조각은 변화한다. 조각의 수축과 확장이 관객의 동세에 따라 귀결된다. 조각의 인식뿐만 아니라 전체 환경에 대한 인식도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문제는 이 커다란 작품이 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과 동선을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분초를 다투며 사는 뉴욕 시민 가운데, 이 작품이 야기하는 공간 인식 변화를 반기는 사람은 드물었고, 곧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관료주의가 호위하는 엘리트 예술가 대 대중’이라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도록 바람을 잡은 것은 얄궂게도 미술비평가였다. 그레이스 글룩은 <뉴욕타임스> 1981년 8월7일치에 ‘뉴욕의 야외 조각 사파리’라는 제목의 직설적 평문을 기고해 대형 공공미술품을 두루 비판했다. 그는 세라의 <기운 호>가 “약자를 괴롭히는 꼴사나운 작품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한 야외 미술품일 터”라고 단언했다.
같은 해 9월 말 작품 철거를 요구하는 청원운동이 시작됐고, 제이콥 재비츠 미연방 빌딩에서 일하는 공무원 1300여 명이 연판장에 서명했다. 해당 청원서는 이 작품이 “광장의 조경과 쾌적함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위협적이고 불길한 느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주장했다(‘녹슨 철판에 불과한 작품 제작에 17만5천달러나 썼다’는 사실도 대중의 공분을 샀다).
이어 대중 추수적 비평가인 피터 셸달이 뉴욕 무가지 <빌리지 보이스> 1981년 10월14일치에 ‘예술적 지배’라는 제목의 공격적 칼럼을 기고했고, 비난 여론은 하늘을 찔렀다. 꼴불견으로 지목된 <기운 호>엔 낙서가 끊이지 않았고, 반달리즘의 세례를 받은 작품의 모습은 꽤 흉악했다. 주요 언론은 이 작품을 둘러싼 공방을 소상히 보도했다. 분개한 작가는 “내후성 강판이란 재료가 미적으로 추하다는 비판은 웃기는 일”이고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이 나라에서 ‘정치적 속죄양’이 됐다”고 반박했다.
결국 다툼은 법정으로 갔다. 1985년 3월 사흘에 걸쳐 공청회가 열렸고, 보존을 주장하는 122명과 철거를 요구하는 58명이 증언에 나섰는데, 재판정은 4 대 1로 작품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불굴의 예술가인 세라는 즉각 항소했고, 수년간 지루한 소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각가는 최종 패소했고, <기운 호>는 1989년 3월15일 연방 정부에 의해 (세 조각으로 잘려) 해체됐다.
미술.디자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