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그는 아직도 살아서 불지른다

367
등록 : 2001-07-11 00:00 수정 :

크게 작게

20세기 젊은이들의 심장에도 살아 있는 60년대 반항의 아이콘, 짐 모리슨 30주기

사진/ 짐 모리슨과 그의 밴드 도어즈. 그는 무대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몸부림치며 고함을 질러댔고 관객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SYGMA)
“아버지, 난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과 밤새도록 하고 싶어. 그건 가슴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1967년 미국 LA의 한 클럽에서 검은 가죽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읊조리듯 노래하기 시작했다. 10분이 넘게 이어지는 연주 가운데 그의 흩어진 갈색머리는 땀에 젖었고, 눈빛은 광기로 활활 타올랐다. 노래말 가운데 ‘fuck’이라는 단어가 괴성처럼 반복됐고, 참을 수 없었던 클럽 주인은 그날로 밴드를 해고시켜버렸다. 그러나 무대 위의 짐 모리슨은 부모와 격한 언어로 다투고 거리로 뛰쳐나온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이 노래말은 부정의 시대, 60년대의 표상으로 새겨졌다.

법정까지 간 무대 매너


언제나 시대와의 불화를 겪는 젊은이들은 있어왔고, 그들을 대변하는 반항의 대변자는 있어왔지만 짐 모리슨만큼 긴 생명력을 가진 반항의 아이콘은 찾기 힘들다.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젊은 육신을 누인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는 아직도 그를 경배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 올해로 30주기를 맞이한 짐 모리슨의 무덤에는 1만명이 넘는 추모객들이 모였다. 60년대 히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사이키델릭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나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짐 모리슨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젊은이들의 심장에 뜨거운 피를 제공하는 반항의 아이콘으로 살아숨쉬고 있다.

짐 모리슨과 그의 밴드 도어즈가 등장한 67년은 ‘사랑의 여름’으로 알려진 해다. 베트남전과 존슨 정부, 그리고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있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히피라고 이름지워진 이들은 거리로 나와 반전 시위를 벌였고, 시위를 통제하는 경찰의 총구에 꽃을 꽂았다. 비틀스는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연주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All You Need Is Love〉)이라고 히피의 복음을 뿌렸다.

UCLA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짐 모리슨은 LSD를 각설탕 먹듯 즐겼다는 것 외에는 히피적인 면모를 볼 수 없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군 장성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자라면서 부모 세대에 대한 반항심은 강했지만, 정치적인 발언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머리에 꽃을 꽂으며 사랑을 외치지도 않았다. “나는 무대에 올랐을 때만 유일하게 스스로 열려 있음을 느낀다”고 <뉴스위크>의 인터뷰에서 밝히긴 했지만 밴드를 결성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록가수가 되리라는 꿈도 꾸지 못하는 소심한 젊은이였다. 다만 죽음과 폭력, 반역과 혼돈 등을 시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노트에 쌓고 있었다. 학교 친구이자 클럽밴드에서 건반을 연주하던 레이 만자렉을 만나면서 그의 에너지는 음악으로 길을 찾게 된다. 당시 히피들의 필독서였던 올더스 헉슬리의 책 <인식의 문>에서 이름을 딴 도어즈를 결성한 짐 모리슨은 다른 밴드들이 그렇듯, 지역 클럽을 전전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훗날 법정까지 가게 된 그의 악명 높은 무대 매너는 클럽밴드 시절부터 늘 화제가 되었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무대에 오르곤 하던 그는 무대에서 몸부림치며 고함을 질러댔고, 관객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해 주인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반대로 그의 카리스마에 빠져든 관객은 점점 늘어났다. 문제의 노래말이 담긴 〈The End〉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도어즈는 67년 첫 앨범 〈The Doors〉를 발표했다. 마이너 레이블 일렉트라에서 낸 음반이었지만 나오자마자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수록곡 〈Light My Fire〉는 발표된 지 두주 만에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했다.

젊은 세대의 어두운 맥박을 감지하다

사진/ 모리슨이 젊은 육신을 누인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는 아직도 그를 경배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SYGMA)
도어즈의 인기는 플라워 무브먼트의 절정에서 불붙었지만 그들의 음악은 다른 히피 그룹들과 달랐다. 사이키델릭에 속하기는 했지만 현란하고 취한 듯한 사운드와 달리 그들의 음악은 블루스에 가까웠다. 도어스 음악의 중심은 짐 모리슨이 만든 시적인 가사와 음울하고 파괴적인 그의 무대 매너에 있었다. 다른 히피밴드들이 약을 통한 구원이나 몽상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하는 동안 그는 폭력과 공포, 죽음에 대해서 노래했다. 그는 자신의 세대에 대해 다른 밴드들이 몰랐던 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롤링스톤>은 “스스로를 자유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세대는 또한 자신의 파괴에 대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 모리슨은 이해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기존의 관습과 통념을 깨는 젊은 세대의 에너지 속에 도사리고 있던 어두운 맥박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앨범의 성공 이후 오른 스타 자리에서 그는 당황하고 불편해했다. 수만명이 운집한 공연장에서 그의 행동은 더욱 난폭해졌다. 그의 공연장은 언제나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67년 한 공연장에서 무대 뒤의 경찰과 시비 끝에 연행되기도 했다. 69년 마이애미 공연은 도어즈의 몰락을 가져왔다. 평소처럼 술과 마약에 취한 채 예정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난 다음 무대에 오른 그는 공연중에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성기 노출까지 한 그는 경찰에 구속됐고, 벌금형을 받았다. 가뜩이나 도어즈를 못마땅해 하던 언론과 보수층은 도어즈의 기행을 확대해서 유포했고, 그들의 공연일정은 모두 중단됐다.

이 사건으로 빚더미에 오른 도어즈는 빚을 갚기 위해 2년 동안 다섯장의 음반을 내야 했고, 천재의 등장에 비견했던 첫 앨범에 비해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관능적인 정치인”이라고 일컬었던 짐 모리슨은 변태, 성도착자 등의 비판으로 매도됐다. 그 자신 역시 술과 마약에서 헤어날 길 없이 허우적댔다.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71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자서전과 시집을 내는 등 다시 일어서려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결국 같은 해 파리의 한 호텔 욕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심장마비였지만 정확한 사인규명은 되지 않았다. 짐 모리슨의 성공과 몰락은 짧았던 플라워 제너레이션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다. 열병과 같던 60년대가 끝나자 젊은이들은 치렁치렁한 머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제 자신이 비난했던 부모가 되어 자식과 다투거나 점점 늘어나는 허리사이즈를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짐 모리슨은 여위고 반항적인 눈빛을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젊은이들의 심장 속에 살아 있다. “자 어서 와서 내 불을 밝혀봐. 이 밤을 불지르는 거야”(〈Light My Fire〉) 도발하면서 말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