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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하에서 한국식 아트사커를 보다

아시안컵 바레인전에서 두 골 기록하며 대표팀 승리 이끈 한국 축구의 유망주,
구자철을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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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19 16:33 수정 : 2011-01-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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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을 말하기 위해 우선 박주영을 생각해보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시안컵이 열리기 직전 부상으로 빠진 박주영의 긴급한 ‘보완재’로 구자철이 떠올랐다가 아시안컵 C조 1차전 바레인전 직후 늠름한 ‘대체재’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직 조별 리그 중이고 같은 조의 강자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를 앞둔 상황이지만, 박주영의 부재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구자철은 제 몫을 초과 달성해냈다.

‘박주영 대체재’를 넘어

지난 1월11일 오전(한국시각) 카타르 도하 알가라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컵 C조 바레인전에서 첫 골을 성공시킨 구자철(오른쪽)이 이청용과 환호하고 있다.연합 김주성

박주영은 지난해 12월23일 FC소쇼와의 프랑스 리그앙 19라운드(2-1 승)에서, 후반 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넣었다. 극심한 부진 끝에 1부 리그 강등 위기까지 내몰린 상황, 1-1의 숨 막히는 후반 48분(그러니까 추가 시간 3분까지 흐른 시점)에 박주영은 동료 세르주 각페의 예리한 직선 패스를 받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박자 빠른 오른발 슛으로 역전 결승골을 터트렸다. 그 상황은 아시안컵 첫 경기 바레인전에서 구자철의 첫 번째 골로 재연되었다. 기성용의 낮게 깔리는 슈터링이 페널티박스 중앙의 구자철에게 연결되었고 그는 0.00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슛을 터트렸다. 거의 흡사한 양상의 두 골로, 박주영은 2개월 연속 팀 자체 선정 ‘이달의 선수’로 뽑혔고 구자철은 조별리그의 히어로로 떠올랐다.

다시, 박주영을 언급하건대, 소쇼전에서 터트린 결승골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경기에서(박주영은 2005년 6월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후반 종료 직전 대표팀 데뷔골을 터트렸다) 그는 골을 잡아내는 킬러 본능만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연출자의 면모까지 유감없이 보였다. 그의 공격 시발점은 상대 문전이 아니라 중앙원 부근이었으며 상하로 직진하는 일만이 아니라 좌우로 교행하면서, 때로는 대각선으로 중원을 가로지르면서 상대 수비수를 뒤흔들었다.

박주영이 소쇼전에서 큰 부상을 입자 조광래 감독을 포함해 코치진과 선수들 그리고 언론과 축구팬들이 하나같이 ‘박주영의 대안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박주영과 같은 경기 운영의 총체적인 유연성과 파괴력, 상상력과 화룡정점의 골 결정력의 대안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체력만으로 상대 문전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슈팅력을 과시하거나 공수의 균형을 건조하게 유지하는 패스만 하는 선수가 아니라, 혼란한 전술 상황에서 이 모든 요구를 90분 동안 침착하게, 더욱이 능란하게 해낼 이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던 것. 곧 구자철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그는 그 소임을 훌륭히 해냈다.

비단 첫 경기 두 골 때문이 아니다. 흡사 견고한 대리석을 마주한 조각가처럼, 경기 초반에 상대의 근육과 살과 피돌기를 정밀하게 탐사하는 것, 그것이 이뤄질 때까지 결코 중원을 내주지 않고 침착하게 균형을 잡아가는 것, 이윽고 그 탐사(훈련 과정의 도상학이 아니라 실제로 상대와 몸을 부딪치면서)가 마무리되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능란하게 움직이면서 박지성, 이청용, 지동원, 차두리 등의 동료와 함께 한 뼘의 공간을 확보해 거대한 영토로 지배해가는 것, 그 과제를 구자철이 해냈다.


‘컴퓨터 축구’는 세계적 흐름

바레인과의 첫 경기, 전반 초반에 공격 최전선에 선 지동원과 그 아래를 떠받친 미들라이커(‘미드필더+스트라이커’의 합성 신조어) 구자철이 서로의 ‘위치와 관계’를 설정하지 못해 공간이 뒤섞이는 어수선한 일이 한두 차례 있긴 했다. 그러나 이내 두 선수는 수시로 상하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평균 8명이 늘어선 바레인의 수비를 흔들기 시작했다. 구자철의 두 골은 전술적 유연함과 그라운드의 혼란상을 순간적으로 독해하는 능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같은 일은, 얼마 전까지 박주영 선수가 했다.

물론 이 상황은 그라운드 안의 독전관 박지성이 전황을 통솔하는 가운데 그라운드 바깥의 최종 결정권자 조광래 감독이 거의 1분 단위로 치밀한 작전을 전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조광래 감독은 2010년 7월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세밀한 패스워크에 따른 공간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실천했다. 조광래 감독은 “굳이 모델로 꼽는다면 스페인 축구”라고 말한 바 있고, 그 원칙에 따라 대표팀을 구성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짰으며 평가전 역시 그 맥락에서 치렀다. 부분적인 찰과상이 없지 않았으나 바레인전에서 그 성과가 나타났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전·후반 90분 동안 시도한 패스는 321번, 바레인은 145번이다. 물론 바레인은 상대적 약체로 수비 위주의 진을 펼쳤고, 우승을 목표로 하는 한국은 수시로 위치 변경을 해가며 패스를 시도하긴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성공률인데, 한국은 대략 79%의 패스 성공률을 보였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우승국 스페인의 평균 패스 성공률 80%에 근접한 수준이다.

조광래 감독은 이청용에게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게임이다.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 머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관점에서, 마치 컴퓨터게임에서나 가능한 세밀한 전술 훈련을 실시했고, 두뇌 플레이어로 꼽히는 이청용조차 “만화에서나 가능한 축구”라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조광래 감독의 스페인 스타일 혹은 ‘만화 축구’는 정교하다. 격전과 혼란의 그라운드에서 일일이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레인전 직후 조 감독이 구자철에 대해 “약간 포지션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다. 2선에서 뛰다가 1선으로 침투하라고 지시했는데 미리 1선에 가서 밸런스를 깨뜨린 장면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 그 사례다.

이러한 흐름은 비단 조광래 감독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것이다. 은퇴한 지네딘 지단 선수를 자국으로 귀화시켜 예의 화려하고 정교한 ‘아트사커’를 재현하라고 하면 그저 팔짱 끼고 경기를 즐길 수 있겠지만, 현재 세계 각국의 감독들은 패스와 공간 상상력에 의한 영토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대표팀의 홍명보 감독도 “이젠 머리로 축구를 해야 한다. 그것이 꼭 머리에서 피가 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 축구 문화 선순환의 결실

‘새로운 축구’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뤄진다. 박주영만 해도 그같은 환경이 부족해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나갔다 와야 했다. 그런데 조금씩 사정이 변하고 있다. 구자철은 넓게 보면 ‘포스트 2002’ 선수라고 할 수 있다. 풍부한 경기장 인프라, 발달한 K리그 유스 시스템, 축구협회의 선진 프로그램 도입, 각급 대표팀 훈련 방식의 선진화, 지도자들의 마인드 변화 등이 차근차근 이뤄졌고 이 새로운 축구 문화 위에서 이청용, 기성용, 지동원 그리고 구자철 등이 성장했다. 유망주가 국내의 축구 프로그램에 의해 성장하고 해외로 진출해 더욱 성숙하는, 그런 선순환의 구조가 성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자철에 주목하고 기대하는 것은 결코 첫 경기 두 골 때문이 아니라, 축구 문화의 성숙으로 맺힌 아름다운 열매를 오랫동안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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