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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정받지 않으려면 이겨라?

청각장애인 야구부의 도전기라는 휴머니즘 속에 숨은
자본주의식 경쟁 이데올로기,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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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19 15:18 수정 : 2011-01-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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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는 청각장애인야구단의 실화에 1970년대 청소년 영화나 80년대 만화방에서 즐겨 보던 스포츠만화의 온갖 클리셰를 덧입힌 영화다. 그 결과 ‘<라디오스타>+<말아톤>+<맨발의 꿈>’이 되었다.

실화에 장르적 클리셰를 덧붙이다

< 글러브 >

가톨릭계 청각장애인학교인 충주성심학교에는 고교 야구부가 있다. 2002년 9월 조일연 교감의 설두로 창단돼, 제일은행 실업팀 선수였던 김인태 감독과 프로야구 쌍방울의 선수였던 박상수 코치의 지도 아래, 수화 통역 선생님을 두고 선수 10명이 연습에 돌입해 2003년 봉황기대회에 출전했다. 전교생과 학부모로 구성된 응원단 150여 명과 청각장애인 서포터스의 응원 속에 펼쳐진 전국 4강 성남서고와의 첫 경기에서 10-1로 패했다. 이후 해마다 봉황기대회와 친선경기에서 더 나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는 이들을 다룬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그 아이들의 홈런>과 <태양을 향해 쏴라>가 방영됐고, 어린이 동화 <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야구부입니다>와 조일연 교감의 저서 <태양을 향해 쏴라>가 나왔다.

강우석 감독은 이 실화에 여러 영화와 만화의 설정을 버무린다.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였지만 폭력사건으로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제명 위기에 놓인 김상남이 매니저의 주선으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로 내려온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김상남은 자신이 진심으로 야구를 좋아했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에게 이끌려 차츰 애정을 쏟는다. 그러나 ‘봉황기 1승’이라는 목표에 비해 실력과 사기가 형편없다. 김상남은 새 투수를 영입하고, ‘파이팅’을 고취하기 위해 ‘뺑뺑이’를 돌린다. 군산상고와의 연습경기에서 무참하게 패한 선수들을 학교까지 뛰게 하며, 분노와 투지를 일깨운다. 그는 ‘진심으로 이기려는 마음’이 있어야 야구를 즐길 수 있으며, 동정받지 않기 위해 이기려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김상남은 영구 제명되고, 학교운영위원회는 야구부의 존폐를 논의한다. 그러나 어쨌든 대회는 열리고, 이하 생략.

영화는 자동 생산라인을 거쳐 나온 기성품처럼 익숙한데다, 강우석표 영화답게 설명적이다. 후반부는 아예 야구해설가를 통해 코멘터리를 곁들인다. 물론 영화의 재미나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단순하나마 감동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와 스포츠와 승부욕과 상업영화가 어떻게 결합되고 배치되는지를 곱씹어보면 개운치 않다. 스포츠는 온갖 장르적 클리셰를 통해 상업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며, 스포츠의 많은 정신 중 승부욕만이 강조된다.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적 삶에 반성이 촉구되는 지금, 승부욕은 대놓고 부르짖기 민망한 덕목이지만 장애인이기에 정당한 양 외쳐진다. 즉 서사를 통해 승부욕을 강조하고, 장르를 통해 상업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다. 장애는 이를 정당화하고 휴머니즘이라는 당의를 입히기 위해 동원된 알리바이다. 이런 판단이 모함인지 아닌지는 영화가 장애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에서 김상남은 학교에 오기 전후의 거취가 명확하다. ‘프로’야구 선수로, 슬럼프를 극복하고 해외로 나간다. 반면 학생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이후의 삶은 영화의 관심 밖이다. 영화는 이들이 야구를 하는 게 옳은지 공부를 하는 게 옳은지 하는 문제를 대사 한 줄로 지나간다. 어떤 공부를 하는지(음악 수업 장면이 한 번 나왔을 뿐이다), 진로는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참고로 <말아톤>에는 초원이가 공작기계 앞에 시무룩하게 서 있는 장면이 중요하게 배치됐다). 이들이 갈 실업팀이 없으므로 야구는 진로가 될 수 없고, 이들에게 야구는 ‘아마추어’의 그것이어야 한다. 즉, 야구를 통한 인성 함양이 목표가 돼야 한다. 김상남은 승부욕을 고취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기려는 마음’이 그들이 야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데도 매우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파이팅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불쌍하게 보는 것은 영화다. 영화는 야구부 매니저인 나주원 선생과 교장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제 한 몸 챙기는 것조차 힘들다” “가뜩이나 힘든 우리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이라 말한다. 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공의 방향을 감지할 수 없고, 팀플레이에 어려움이 있다”는 장애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과는 매우 다른 언술이다. 무엇을 할 수 없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분치 않고,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없는 이들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영화는 애초 이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할 의욕이 없던 이들로 그리고 나서, 김상남이라는 승부욕의 전도사가 나타나 혹독한 훈련을 거치게 한 뒤, 이들이 강화된 전투력으로 살벌한 경쟁사회에 나서도록 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듯 보인다.

김상남의 막가파식 승리 교육 이전에 ‘장애인 스포츠 교육’이 나름의 역사와 취지를 지닌 채 존재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야구를, 그것도 ‘이기는 야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특정한 장애와 이러저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스포츠를 즐기며 협동심이나 자긍심 등을 기를 수 있느냐가 고찰돼야 한다(참고로 4년마다 세계농아인올림픽이 육상·축구·농구·태권도 등 20개 종목으로 열리고 있으며, 2009년 한국은 3위를 기록했다).

프로 따윈 되지 말자

영화는 “벙어리가 아니라, 청각장애인”이라는 용어로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장애를 철저한 무능력으로 사고하고 있으며, 일반인에게 폐기돼야 할 경쟁과 소외의 가치를 장애인에게 쏟아붓는다. 마치 ‘미개발의 식민지’라도 되는 듯. 그러나 일찍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말하지 않았던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말자’고. ‘‘프로’ 따위는 절대 되지 말자’고. 장애가 있든 없든, 자기계발에 피 빨리지 않고 ‘자신의 야구’를 할 때 행복하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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