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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 축구 '큰 물'에서 놀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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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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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프로무대에 도전장 내미는 안정환·설기현, ‘황금 시장’의 개척자가 될 수 있을까

(사진/한국축구의 유럽진출 가능성이 실험대에 올랐다. 이탈리아 프로무대에 진출한 안정환)
한국축구가 시험대에 올랐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거창한 대회를 앞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선수들의 유럽진출을 두고 하는 얘기다. 한국축구는 일단 리트머스 시험지 2개를 유럽에 던져놨다. 세계 최고의 축구무대인 이탈리아에 뛰어든 안정환(24·페루자)과 벨기에 1부리그로 진출한 설기현(21·안트워프)이 그들이다. 이동국 고종수 이천수 등 유럽에 갈 선수들이 줄줄이 유럽행 티켓을 예약했지만 마지막 탑승전까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안정환 설기현이 당분간은 한국축구를 대표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전망이다.

‘첫 선수’의 활약이 중요하다


안정환은 지난해 한국프로축구 득점왕과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쥔 국가대표선수. 또 설기현은 올림픽대표팀의 유망주로 국가대표까지 지낸 경력에 한국축구가 내놓고 21세기 희망으로 추켜세우는 선수다. 때문에 이들이 유럽에서 얼마만큼 활약하는지는 앞으로 한국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잣대가 될 게 분명하다.

일본도 그랬다. 일본은 지난 98년 월드컵 직후 나카타가 본격적인 유럽진출의 테이프를 끊었다. 나카타의 성공은 대단했다. 이적료 300만달러에 이탈리아 페루자팀에 입단했다. 나카타는 불과 1년 뒤, 2500만달러의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기록하며 ‘AS 로마’로 옮겼다. 나카타가 성공하자 유럽에 일본선수 영입 바람이 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있는 아시아선수를 적은 돈에 사들여 비싼 값에 되팔았으니 시세차익이 엄청났던 것이다.

나카타의 후광에 힘입어 ‘유럽특급’을 탄 선수들이 바로 나나미와 조 쇼지였다. 나나미는 99년6월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이적했고, 조 쇼지는 올 초 스페인으로 갔다. 또 최근엔 이런 일본열풍에 힘입어 오노 신지, 이나모토, 나카무라 등 재능있는 젊은 선수들에 대한 유럽팀들의 영입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란의 경우를 살펴보면 왜 개척자들의 역할이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이란이 98프랑스월드컵에서 미국을 꺾고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승을 거두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자 대회가 끝난 뒤 이란선수들에 대한 스카우트 열풍이 불었다. 카림 바게리, 알리 다이에, 아지지 등 이란축구의 3인방이 나란히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고, 마다비키야 등 유망주들도 속속 스카우트 대열에 합류했다. 이란은 지금까지 무려 10명 이상의 선수를 유럽에 수출해, 아시아 국가 중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에서 이란선수를 선호하는 것은 개척자로 활약했던 3인방이 뛰어난 플레이로 이들을 매료시켰기 때문. 선배 잘둔 후배들은 거저 ‘무임승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선 이란이 유럽과 인접해 있어 선수들의 체격이 유럽선수들과 비슷하고 이란 특유의 근성이 뛰어나 요즘도 끊임없이 스카우트하고 있다. 최근엔 안정환이 속한 페루자가 이란의 신예 알리 카리니와 계약하기도 했다.

한국선수가 유럽에 도전한 사례는 그동안 많았지만 그 시도만큼 뚜렷한 성공은 별로 없었다. 90년대 이후 황선홍 김주성 서정원 등이 황금을 쫓아 유럽으로 날아갔지만 뛰어난 성공을 거두고 금의환향한 선수는 없었다. 차붐(차범근)의 분데스리가 드림과 허정무의 네덜란드 성공은 아직껏 신화로 남아 있다.

유럽의 ‘덩치’를 견뎌낼 것인가

(사진/안정환과 벨기에 1부리그의 설기현의 활약에 따라 다음선수등이 쉽게 가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유럽에서 실패가 잇따르자 최근 3∼4년 전부터는 재능있는 선수들이 쉽게 돈을 벌 요량으로 유럽보다 일본쪽을 더 선호하고 있다. 또 마땅한 루트도 없었다. 최근에야 세계화 추세에 힘입어 유럽시장을 뚫기 시작했지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유럽은 멀고도 먼 땅으로 인식됐다. J리그에 뛰어든 홍명보 유상철 하석주 노정윤 윤정환 고정운(현 포항) 등은 유럽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선수들로 평가되지만 구단의 반대로 때를 놓친데다 마땅한 끈이 없어 유럽진출의 길이 막힌 케이스다.

그러다 올해 안정환 설기현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유럽러시가 이뤄질 전망이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일찌감치 유망주 18명을 선정해, 2002년월드컵에 대비해 해외진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여기엔 고종수 이동국 이천수 서동원 김도균 등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안정환 설기현이 어떤 성공을 거두느냐에 따라 뒤의 선수들이 쉽게 가느냐 어렵게 가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이들의 성공가능성은 반반이다. 막상 가보니 유럽도 별것 아니라는 반응과 막상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이라는 조심스런 관측이 교차하고 있다. 안정환의 경우 이탈리아 중위권인 페루자팀의 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당장 주전을 꿰찰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리그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설기현 또한 연습경기에서는 단연 팀의 원톱으로 맹활약했지만 본격 시즌에 들어가면 수비수들의 집중견제를 어떻게 뚫느냐가 숙제다. 이들 소속팀 감독들은 한결같이 몸싸움에 약한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아무래도 스테이크를 먹어대며 살을 찌운 유럽선수들의 체력과 체격엔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러피언 드림’을 낙관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유럽진출은 도박과도 같다. 성공하면 그야말로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제 축구선수의 이적료는 600억원을 돌파했고(포르투갈 피구), 연봉도 70억원 시대(브라질 히바우두)를 활짝 열었다. 물론 톱스타의 경우다. 하지만 이름없는 무명선수들은 한국프로축구 톱스타들이 받는 연봉보다도 훨씬 못받는다.

또 나라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다. 10만달러(세금 포함)의 연봉을 받는 설기현의 팀 내 연봉 서열은 ‘무려’ 2위. 더구나 유럽은 세금이 최소 30% 이상의 고세율이라 대외적으로 발표되는 수입에 비해 실질 소득이 훨씬 적은 경우가 많다. 고만고만한 ‘작은 성공’이라면 차라리 국내에 있는 것만도 못한 ‘빛좋은 개살구’가 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최근 유럽에 진출했다가 국내로 다시 U턴하는 선수들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이유가 많이 작용하고 있다.

성공의 관문은 10골

일단 공격수들의 성공 기준은 10골이다. 한 시즌 보통 35∼38게임에서 10골 이상을 기록하면 충분히 유럽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 가능성이 보이면 그때부터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연봉이나 이적료가 천문학적으로 뛴다. 성공만 한다면 야구의 박찬호 못지않게 거금을 쥘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바로 유럽이다.

하지만 10골을 넣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철저히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나 향수병도 큰 복병이고 문화, 팀분위기 등에도 적응해야 한다.

특히 음식은 무엇보다 선결해야 할 과제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덩치 큰 선수들과 맞붙기 위해 끼니 때마다 일부러 스테이크를 먹으며 힘을 키운 차범근의 얘기는 충분히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앞으로 1년, 선구자처럼 먼저 떠난 이들이 어떤 활약을 보이느냐에 한국축구의 명예와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성욱/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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