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는 찌라시보다 더 강렬한 미디어… 브랜드 제일주의에 반기 든 ‘티셔츠행동당’
지난 6월23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옆 엠폴리스 앞마당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티셔츠행동당 창당대회라고 이름붙은 이 행사에는 구호나 깃발도, 연사의 침튀기며 갈라지는 목소리도 없었다. 대신 오후 2시부터 자정 가까이까지 펑크밴드들의 공연이 이어졌고, 그 옆에서는 스케이드보드족들이 쉼없이 아슬아슬한 보딩의 묘기를 연출했다. 400명 가까이 모인 군중은 머리띠나 어깨띠 대신 뾰족뾰족한 펑크머리와 고딕 화장을 한 모습으로 헤드뱅잉을 하거나 춤을 췄다. 흔하디 흔한 엽기성 제목을 단 콘서트 현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행사장을 둘러싸고 있는 줄에 빽빽이 걸려 있는 수십종의 티셔츠였다.
패션 파시스트들이여, 역사의 무덤으로!
아나키스트를 의미하는 대문자A, 두건을 두른 멕시코 게릴라 지휘자 마르코스의 얼굴, 스타벅스 로고 위에 커피가 끼얹어 있는 스타퍽스(Starfucks) 등 예사롭지 않은 그림들이 찍혀 있는 티셔츠 30여종이 행사장과 판매대에서 청중과 만났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티셔츠행동당의 창당선언. ‘…우리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각종 허위의식으로만 가득 도배된 브랜드 제일주의를 경멸한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럴싸하게 붙인 뒤 온갖 화려한 마케팅 기법과 막대한 자본을 살포하여 반복학습을 시킴으로써 소비자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구시대의 패션 파시스트들은 이제 역사의 무덤으로 사라져야 할 때다….’ 주최쪽인 DIY 티셔츠 행동가 집단인 티셔츠행동당은 스트리트 패션의 상업주의와 브랜드 제일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티셔츠는 미디어다.” 티셔츠행동당의 주장은 새로운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학에서, 노조에서 큼지막한 구호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꽤 많다.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하기보다는 티셔츠를 입는 편이 훨씬 손쉬운 의사표시의 방법이다. 비단 정치적 구호만이 아니다. 커트 코베인이나 섹스 피스톨스의 모습이 찍혀 있는 티셔츠를 입은 사람끼리 만나면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이미 하위문화의 지지자로 정서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흰색 무지 티셔츠에 얄밉도록 앙징맞게 찍혀 있는 나이키와 푸부의 로고는 동대문에 깔린 5천원짜리 티셔츠의 소비자들과 나를 구별짓는 얼마나 깔끔한 도상인가. 티셔츠는 오랫동안 가장 친숙하면서도 강렬한 미디어로 군림해온 것이다. “찌라시 대신 티셔츠를 만들자.” 동대문의 당사(?)에서 만난 티셔츠행동당의 ‘왕언니’ 이일희씨는 행동당의 모토를 이렇게 요약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이 상체를 둘러보세요. 삶의 내용과는 무관한 브랜드나 캐릭터, 아니면 미국 상류층 대학들의 100년 묵은 로고나 심지어 제국주의 나라들의 군대 상징물이 도배돼 있을 뿐입니다.” 단지 비상업적이고 불손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장패션마저 외면하는 ‘다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게 티셔츠행동당의 창당취지다. 일곱평 남짓한 사무실은 프린트 공장에서 막 가져온 30여종의 티셔츠 수백점과 세대의 컴퓨터, 그리고 빼곡히 쌓여 있는 LP와 CD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밥 말리의 음악이 있었다. 언뜻 짝퉁처럼 보이는 로고 아래 ‘Fuck U Bourgeoisie’라고 쓰여 있는 푸부의 패러디, 소비자의 윗입술에 갈고리처럼 끼워져 있는 나이키의 로고가 인상적인 티셔츠들이 눈에 띄었다. “브랜드는 티셔츠 원가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갈취 수준의 가격 폭리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욕망을 조작해 결국 소비자를 노예로 만듭니다. 거기에 반기를 들자는 거죠.” 다품종 소량생산… 물물교환으로
왕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4명의 “의류 노가다”들이 주축이 된 이 결사체는 지난해 가을 기획되어 올 1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대표, 디자이너, 원단 담당, 행정업무 등 형식적으로는 담당업무가 나뉘어 있지만 사실상 모든 업무는 공동작업이다. “티셔츠에 인쇄할 그림을 결정할 때까지 많은 토론이 이뤄집니다. 그저 예쁜 그림이나 잘 팔릴 디자인은 무의미하죠.”
이들이 지향하는 생산방식은 다품종 소량생산.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높이고, 스스로 기업화되는 길을 막기 위해서다. 판매는 모두 온라인(www.theT.co.kr)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온라인을 고집하는 이유는 소비자들과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티셔츠 디자인은 모두 온라인상의 토론을 통해서 결정할 겁니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놓든 소비자가 내놓든 온라인상에서 그 의미와 제작방향을 토론한 뒤에 제작에 들어가게 되죠.” 단순히 웹상의 토론뿐 아니라 원하는 사람이나, 티셔츠를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실제 제작현장에 참여를 유도해서 노동과 소유를 일치시키겠다는 생각이다. 이들의 비즈니스 역시 물물교환이라는 반자본주의적 방식을 취한다. 창당대회 때 참여했던 밴드들과도 그랬고, 인물로 처음 등장한 가수 신중현씨와도 공연 때마다 티셔츠를 여러 벌 제공하기로 하고 초상권을 샀다. 물론 독점권은 아니다.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브랜드 상업주의만이 아니다. 어릴 적 주사위를 던지며 지겹도록 놀던 뱀주사위판, 이제는 기억 너머로 사라진 프로야구단 슈퍼스타즈의 로고 등도 디자인으로 등장한다. 유행하는 복고풍이나 키치적 기호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간첩을 잡으면 수십계단을 껑충 뛰어올라가는 방식이라는 치졸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을 하던 시절을 성찰해보자는 거죠. 삼미 슈퍼스타즈의 탄생과 소멸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모토로 태어난 프로야구를 실상 지배해온 정치논리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고요.” ‘우주정자’씨의 디자인 배경 설명이다. 사이트 숍에 전시된 티셔츠에 디자인 의도를 상세하게 설명해놓을 뿐 아니라 사이트에서 함께 운영하는 웹진 ‘행동당 문화전선’에서는 거리의 하위문화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실을 예정이다.
패션과 저항 사이에서의 줄타기
유통과 마케팅 비용을 배제한 최저가 판매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판매를 전제하는 이들의 활동에 비판의 여지도 있다. 반자본주의적 하위문화를 상업화하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이들이 추구하는 안티브랜드가 또다른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체 게바라가 세련된 패션이 된 것처럼.
“지나친 순결주의예요. 결국 싸움은 체제 안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하는 한 당원의 반격을 왕언니가 이어받았다. “사실 쉽지 않은 문제예요. 창당대회 때 훨씬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티셔츠들은 외면당하면서 비교적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 티셔츠는 완전 품절이 됐거든요.” 이에 대한 전략은 두 가지다. 우선 티셔츠에 라벨이나 행동당의 로고는 완전히 배제했다. 소량 한정판매를 통해 패션화되는 징후를 보이는 아이템은 제작을 중지하겠다는 다짐도 그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대항 브랜드가 우리들의 의도한 정치적·문화적 결과를 얻자마자 자진폐업하겠다”는 공약이다. 기약할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2∼3년을 자신들의 수명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람들이 디자인의 정확한 개념을 몰라도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봐요. 패션화되는 것은 반대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는다는 것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거니까요.” 디자이너 ‘럭셔리 강’의 말은 패션과 저항의 경계선 위에서 이들이 타게 될 줄타기를 예측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새로운 문화란 늘 있었던 것, 언제나 그래왔던 것에 대한 의심과 작은 균열의 진동에서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이다.
티셔츠행동당 (www.theT.co.kr)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티셔츠는 미디어다.” 티셔츠행동당의 주장은 새로운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학에서, 노조에서 큼지막한 구호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꽤 많다.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하기보다는 티셔츠를 입는 편이 훨씬 손쉬운 의사표시의 방법이다. 비단 정치적 구호만이 아니다. 커트 코베인이나 섹스 피스톨스의 모습이 찍혀 있는 티셔츠를 입은 사람끼리 만나면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이미 하위문화의 지지자로 정서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흰색 무지 티셔츠에 얄밉도록 앙징맞게 찍혀 있는 나이키와 푸부의 로고는 동대문에 깔린 5천원짜리 티셔츠의 소비자들과 나를 구별짓는 얼마나 깔끔한 도상인가. 티셔츠는 오랫동안 가장 친숙하면서도 강렬한 미디어로 군림해온 것이다. “찌라시 대신 티셔츠를 만들자.” 동대문의 당사(?)에서 만난 티셔츠행동당의 ‘왕언니’ 이일희씨는 행동당의 모토를 이렇게 요약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이 상체를 둘러보세요. 삶의 내용과는 무관한 브랜드나 캐릭터, 아니면 미국 상류층 대학들의 100년 묵은 로고나 심지어 제국주의 나라들의 군대 상징물이 도배돼 있을 뿐입니다.” 단지 비상업적이고 불손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장패션마저 외면하는 ‘다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게 티셔츠행동당의 창당취지다. 일곱평 남짓한 사무실은 프린트 공장에서 막 가져온 30여종의 티셔츠 수백점과 세대의 컴퓨터, 그리고 빼곡히 쌓여 있는 LP와 CD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밥 말리의 음악이 있었다. 언뜻 짝퉁처럼 보이는 로고 아래 ‘Fuck U Bourgeoisie’라고 쓰여 있는 푸부의 패러디, 소비자의 윗입술에 갈고리처럼 끼워져 있는 나이키의 로고가 인상적인 티셔츠들이 눈에 띄었다. “브랜드는 티셔츠 원가의 수십배에 해당하는 갈취 수준의 가격 폭리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욕망을 조작해 결국 소비자를 노예로 만듭니다. 거기에 반기를 들자는 거죠.” 다품종 소량생산… 물물교환으로

사진/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티셔츠행동당원들은 일곱평 남짓한 사무실 공간에서 끊임없이 토론한다.(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