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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게임 같은 영화, 콤플렉스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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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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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 레이더>가 제시하는 새로운 길… 영화를 향한 게임의 오랜 짝사랑을 실현할 것인가

<스타크래프트>에 이어 <디아블로2>의 국내 판매량이 100만장을 넘어섰다. 전국 관객 800만명을 넘어선 영화 <친구>에 비하면 대단치 않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1인당 고작 두 시간을 점유할 뿐이지만 <디아블로>는 최소한 스무 시간, 길게는 몇백 시간까지 잡아먹는 게임이다. 돈으로 따져도 그렇다. 전체 시장 규모에서 게임산업은 이미 영화산업을 넘어섰다. 하지만 양적 우위가 질적 우위를 담보해주는 건 아니다. 게임에는 난치병이 있다. 바로 영화에 대한 짝사랑이다.

영화 <슈퍼 마리오>가 실패한 이유

최초의 게임은 단색 화면 위의 점과 선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극적으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영화 <스타워즈>에서는 정교한 우주선이 드넓은 우주를 종횡무진했지만 게임 <스타워즈>는 셀로판지를 붙여 억지로 컬러 분위기를 낸 화면 위에서 점 몇개가 조잡한 기계음과 함께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래도 게임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직접 플레이하는 사람만이었다. 처음의 신기함이 사그라질 때면 구경꾼 입장에서 별반 재미있을 게 없었다.


사진/ 게임 같은 영화 <툼레이더>.
영화 앞에서 게임 제작자들은 반쯤은 질투심, 나머지 반쯤은 자괴감을 느꼈다. 좀더 많은 것을, 좀더 실감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는 기술수준만의 문제는 아니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고 앞으로 더 빠르게 진보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또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게임 제작자들은 오랜 짝사랑 대상인 영화를 끌어들였다. 게임에는 영화문법을 온전히 따르는 동영상들이 삽입되기 시작했다.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말은 대단한 칭찬이었다.

게임이 영화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에서 어떤 영화사들은 게임이란 신흥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산업은 게임 캐릭터들의 상업적 파괴력을 이용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 닌텐도가 만든 <슈퍼 마리오>는 지금까지 수천만장을 판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리즈 중 하나다. 영화사는 캐릭터의 힘만 믿고 영화를 만들었다. 게임에서 곧장 뛰어나온 듯한 주인공들이 벌이는 황당한 모험극. 하지만 평론가는 물론 관객도 이 영화를 외면했다. 마리오의 팬들만 다 보았더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던 영화가 실패한 것은 물론 원작의 인기만을 노린 안이한 기획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게임의 성공요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슈퍼 마리오>는 쉴 새 없이 점프하며 적을 물리치는 액션게임이다. 직접 점프하는 건 재미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점프하는 걸 손놓고 구경만 하는 건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영화 <수퍼 마리오>는 그래서 실패했다. 영화사는 영화와 게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트랩이 있다고 하자. 영화에선 함정에 빠졌을 때 거기서 과연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를 구경하며 손에 땀을 쥔다. 하지만 게임에서 트랩은 게이머에 대한 도전이다. 머리를 어떻게 쓰고 또 얼마나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지를 겨루는 일종의 퍼즐이다. 같은 트랩이라도 영화와 게임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차이를 이해 못한 영화는 게임에서 캐릭터를 가져다 스스로의 감옥에서 말라죽게 만들었다. 대전 액션게임을 영화화한 <스트리트 파이터>와 <모탈 컴뱃> 역시 게임 속의 무술을 어설프게 펼쳐대는 배우들의 모습밖에 없는 무의미한 영화였다.

<파이널 판타지> <툼 레이더>의 실험

사진/ 영화 같은 게임 <파이널 판타지>.
어떤 게임 제작자들은 좀더 적극적이었다. 영화사에 의해 픽업되기만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게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게임 속에 게임이 아닌 볼거리를 잔뜩 집어넣었다. ‘오리진’의 우주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윙 커맨더> 시리즈의 제작자 크리스 로버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윙 커맨더>는 많은 팬을 거느린 독보적이고 훌륭한 시스템의 게임으로 뛰어난 동영상이 트레이드마크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게임 자체보다 동영상에만 신경쓰는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 로버츠는 급기야 <윙 커맨더>를 영화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비참했다. 게임의 인터랙티브성 없이는 그렇게 찬탄받던 동영상은 숱한 SF영화 장면들의 짜깁기 혹은 흉내내기에 불과했다. 자신만의 무기를 스스로 버리고 뛰어든 전쟁터에서 크리스 로버츠의 싸움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한편 일본엔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있다. 서양까지 정복한 얼마 안 되는 일본 롤플레잉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인 그 역시 영화 같은 게임을 원했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엄청나게 조악한 그래픽으로도 <파이널 판타지> 5편은 어떤 영화 못지않은 극적인 연출을 보여줬다. 그리고 6편에선 비디오 게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라 꼽히는 ‘오페라신’과 ‘쎌레스의 절벽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7편, 8편을 거치면서 주객이 전도되었다. 기술수준의 놀라운 발전과 맞물려 게임은 이벤트 동영상 위주로 재편되었다. 뛰어난 그래픽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정작 게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널 판타지>는 결국 영화화되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은 높은 제작비용을 의미한다. 정점에 오른 7편에 이어 <파이널 판타지>는 여전히 높은 판매고를 올렸지만 그 비용을 다 회수하기에 충분할 정도는 아니다. 만일 영화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제작사인 스퀘어의 인수 합병설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툼레이더>는 세계적으로 수천만장을 팔아치운 3인칭 액션어드벤처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윙 커맨더>나 <파이널 판타지>와는 반대로 영화 같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 같은 영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툼레이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만의 비주얼, 게임만의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영화적 구성은 엉성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했던 사람이라면 눈을 뗄 수가 없다. 앙코르와트 유적의 팔 여섯개 달린 괴물은 특별한 비법 없이는 해치울 수 없었던 중간 보스고, 도망가면서 쌍권총을 쏘는 라라를 보면 백스텝에 해당하는 키조작이 뭐였던가 하는 생각이 난다.

<툼레이더>는 더이상 영화를 짝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해묵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게임영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원작 게임의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얄팍한 장삿속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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