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은 올 11월 광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최대 적수로 보고 있다.REUTERS/ TORU HANAI
▲“국제적이자 지역적” 미국 캘리포니아 종합기술대학의 앤드루 모리스는 대만인에게 야구는 “국제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대만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나라다. 그러나 세계 정상을 경험한 대만 야구는 대만이 국제사회의 ‘앞서가는’ 일원이라는 증거로 여겨진다.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대만 야구는 일본 식민지 시절인 1905년에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대만 국가대표팀과 프로팀의 경기 스타일은 미국식에 가깝다. 경기 전 훈련 시간이 짧고, 타자들은 기술보다는 힘에 의존한다. 포심패스트볼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투수들도 투심패스트볼을 많이 던진다. 한편, 야구는 대만인에게 ‘본토’와 대비되는 대만적인 특성으로 읽힌다. 중국문화권에서 대만은 거의 유일하게 야구가 성행하는 곳이다. 1948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7회 전국체전에 출전한 야구팀은 4개뿐이었다. 대만 대표 한 팀과 대만 선수가 주축인 공군팀과 경찰팀, 그리고 필리핀 화교팀이었다. ▲한국 10월 타이중 대륙간컵대회 한국-대만 경기에서 한 대만 관중이 ‘천안함을 공격하듯 한국을 때려라’는 피켓을 든 장면이 TV 중계에 잡혀 물의를 일으켰다. 대만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받는 야유는 상상 이상이다. 대만 야구 전문가 김윤석씨에 따르면, 1954~2009년 성인국가대표팀 전적은 35승6무28패로 한국이 약간 우세하다. 대체적으로 1982년까지는 한국이 우세했고, 1982년 이후엔 대만이 앞섰다. 1982년은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다. 프로선수의 아마추어 출전은 1998년부터 가능했다. 1991년 대만에서도 프로리그인 CPBL이 출범한 뒤 한동안 국제대회는 양국 최고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잊혀진 무대가 됐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아시아경기대회,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등 ‘드림팀’ 대결 전적은 7승1패로 한국의 압승이다. 왜 대만 야구팬들이 한국에 적개심을 갖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태민 미네소타 트윈스 스카우트는 “아마추어 선수의 기량은 한국과 비슷하다. 어느 해에는 대만에서 더 나은 선수가 나온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을 ‘유망주의 엘도라도’로 여겼던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대만을 새로운 선수 공급지로 여긴다. 김 스카우트는 “지금 마이너리그에 있는 젊은 선수들이 제대로 성장한다면, 한국은 국제대회에서 대만에 밀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CPBL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자극받은 대만 야구계는 1990년 자국 리그인 CPBL을 출범시켰다. 한때 양대 리그 체제로까지 확장된 대만 프로야구는 지금 고작 4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만 프로야구단 모기업은 한국과 같은 대기업이 아니다. 평균 연봉은 한국의 절반 이하다. 최고 연봉 선수 천진펑의 월급여는 3천만원 선이다. 반면 한국 프로야구에선 두산 김동주가 월 7천만원을 받는다. 1992년 6878명으로 최고를 찍은 평균 관중 수는 2000년 1676명까지 떨어졌다. 올해 평균 관중 수도 2690명에 그쳤다. 유망주들은 헐값 계약금에도 해외 리그로 향한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대만의 약세는 대표팀의 근간이 되는 자국 프로야구의 침체가 직접적인 이유다. 김윤석씨는 “한 CPBL 선수는 ‘한국에서 뛸 생각도 있다. 그러나 실패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는 생각에 주저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LG·SK 등 일부 구단은 대만 선수 영입을 검토했지만, 2명으로 제한된 외국인 선수 쿼터 때문에 성사된 적은 없다. 최민규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