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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술 없어요? 그럼 시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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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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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공장에 위장취업한 ‘3번 시다 전순옥 박사’가 귀국 뒤 사는 풍경

미싱공장에 위장취업한 ‘3번 시다 전순옥 박사’가 귀국 뒤 사는 풍경

사진/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박승화 기자)
그는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전혜린의 그림자가 있는 그곳이 문화유적지인 양해서 가보고 싶었던 터이다. 이 근처 어디 아카데믹하거나 혹은 매우 관료적인 곳에서 전순옥 박사를 모셨는가 보다.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얼굴이 환하게 빛나 보였다.

연봉? 한달에 70 받아요


“연봉은 얼마예요?”
“그런 거 없어요.”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라고 다그쳤다.
“정말 그런 거 없어요. 한달마다 받지요.”
연봉계약이니 스톡옵션이니 하는 그런 쿨한 단어를 제치고 촌스럽게 월급이라고?
“한달에 70 정도 받아요.”
며칠 전에 전화했을 때 휴대폰으로 받기가 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소곤소곤 짧게 말하더니 급히 끊어버렸었다. 아, 매우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인가 보다. 특급 정부 프로젝트를 맡아 머리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테이블을 두고 울트라 고위 인사들 앞에서 정장을 쫙 빼입은 전 박사가 멋있게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구먼. 아, 박사가 되어 돌아온 전순옥씨는 ‘발탁’도 되고, 좋겠다. 난 뚱한 목소리로 “다시 전화 걸게요”라고 했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나 좀 비비고 들어갈 데 없을까 싶어서.

“시다 일 해요.” 시다?? 주로 미장원에서 손님 머리카락 쓸어담고 철지난 여성잡지를 이상한 모양의 쿠션과 함께 갖다주는 사람?

“미싱 시다요. 공장이 바로 근처 동네에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예요. 지금 일 마치고 바로 왔는데도 시간이 이래요.”

그는 영국에 가서 11년 동안 공부하고 얼마 전 금의환향했다. 워릭대학 사회학 박사. ‘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와 민주노조의 투쟁’을 다룬 그의 논문은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켜 “그대로 패스!” 하고 외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미싱 시다라니! (미싱사라면 또 몰라도)

“제가 영국에서 논문 마칠 즈음에서부터 했던 생각인데요. 한국의 영세 기업의 근로실태 조사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근로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실태도 알아보고, 세계화된 산업구조 속에서 우리나라 영세, 중소기업들이 어떤 구조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조사해보고 싶었지요. 제 연구에서는 설문지를 돌려서 하는 통계를 쓰진 않아요. 질적 연구방법을 위해서는 현장을 직접 아는 게 중요하지요.”

한국에 온 지 4주 만에 공장으로 나가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일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신다. 하지만 그의 고용주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종아리를 때리기도 하던 큰오빠

“위장취업?”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요. 내가 박사라고 하면 누가 일을 주겠어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에요.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냐, 그런 거 안 물었거든요. 이름도 안 묻는데요, 뭐.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대요. 전 3번 시다예요. 미싱번호에 따라 자기 번호가 매겨지거든요. 1번 미싱에 앉으면 1번 재단사, 그 옆 시다도 1번.”

그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했을 때 한 여성 근로자가 말해주었다.

-열네살에 공장에 들어와 스무살이 넘어서 미싱사까지 되었지만 난 내 이름이 신순예인 줄 몰랐다. 노동조합이란 곳에 가니 나더러 신순예씨 하고 부르더라. 그전까지 내 이름은 그냥 5번 시다, 5번 재단사였다.-

아직 미혼인 그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다”는 각본을 들고 동료들과 섞였다. 그런데 점심밥을 차려주는 할머니가 자꾸만 옆에 와서 묻는단다. 남편하고는 같이 안 사나보네? 같이 살면 애가 있을 텐데. 옆에 있던 미싱사 ‘언니’가 구해주었다 “아, 남의 과거를 자꾸 묻고 그래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한국 모든 노동자의 횃불로 살아 있는 오빠의 누이동생이며, 외국박사라는 ‘과거’를 알게 되면 동료들이 글쎄, 손발을 잘 맞춰줄까.

작은오빠가 공장에 가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몇 가지 일러주었다. 신문 보지 말 것. 책 꺼내서 읽지 말 것. 옆 사람과 괜스레 노동문제 어쩌니 그런 얘기하지 말 것. 무조건 입 다물고 일만 할 것.

그는 종일 미싱사 옆에 서서 옷감을 자르고 뒤집고 다림질한다. 점심시간 30분 정도는 앉을 수 있다.

“어깨가 아파요. 지난 10여년간 너무 가벼운 연필만 들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논문을 ‘세계의 모든 여성노동자들에게’ 바쳤다. “이 논문을 나의 오빠 전태일에게 바칩니다”가 아니다. 오빠가 생전에 잘못해주었나?

“하하하…, 부모님보다 더 엄해서 시험점수 못 받아오면 우리 종아리를 때려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얼마나 귀여워했는데요.”

모든 형제는 허리에 도시락을 싸매고 큰오빠를 따라 서울의 ‘좋은 곳’은 다 돌아다녔다. 그때 한강 물은 푸르고 맑았다. 자하문 밖 자두나무는 열매를 흐드러지게 낳아주었다. 그리고 뚝섬 물고기들은 그들의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큰오빠 친구들은 말했다. “야, 제발 네 동생들 좀 데려오지 말아라.”

전순옥이 읽는 노동일지

그는 지금 서울시내 공장에 있는 대신 영국에 있을 수도 있었다. 지도교수가 함께 연구활동하자고 제안했지만 뿌리쳤다. 우선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빠, 이 노동실태 개선책은 말이야, 이렇게 풀어나가야 할 문제야”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오빠가 살아 있다면.

그는 논문을 쓰면서 70년대 노동사에 특히 여성들의 활동은 거의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 전태일 열사를 위한 30주년 기념행사가 모든 이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노동현실은 얼마나 더 개선되었는가? 자신의 노동일지를 꺼내 읽는다.

“6월6일 서울시내 이화동에 화재가 나서 여공이 죽었지요. 바로 대학로 옆 동네예요. 이 번화한 거리 옆이 공장동네인 거 모르셨지요? 사람들은 말은 많이 하는데 정작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러나 사회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 “강남족이며 일류대학 신입생”들이라고 소개한 학생들이 그룹 스터디용으로 그의 학위논문을 달라고 했다. 그가 공부하러 떠나던 십여년 전에는 이러지 못했다.

그에게 요즘 공장에서의 하루는 정신력과 노동력의 총집합체이다.

“내가 공부할 때도 이랬나 싶어요. 육체노동자들이 하는 만큼 열심히 하면 잘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들고 온 취업정보지 ‘개미시장’을 넘보며 난 얼마 정도 받을지 물어보았다.

“기술 있어요? 없죠? 그럼 시다야.”

노동계의 새로운 희망 3번 시다 전순옥 박사가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권은정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겨레21> 런던 통신원으로 90년대 대부분을 보냈다. 요즘은 시민단체에서 전문 인터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으로 <젠틀맨 만들기>. 옮긴 책으로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은정의 다짐

영국시인 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좋아한다. 비가 와서 어느 한 땅덩이의 기슭이 씻겨나가도 대륙 전체로 볼 때는 손실이며,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도 우리 인류 전체에는 아픔이라고 시인은 일러준다.

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의 삶은 결국 하나의 큰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모습, 다른 생각, 다른 행동, 그것은 곧 ‘나의 모습, 나의 생각, 나의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이 큰 덩어리의 어느 한 구석을 보여줄 이야기는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 작은 즐거움을 드리도록 애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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