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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무슨 약 탔나봐, 나만 좋대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배우 정유미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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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26 10:29 수정 : 2010-10-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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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는 주목성이 없고 정형성이 없다. 주목성이 없어서 새롭고 정형성이 없어서 엉뚱한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사랑니>.

올해만 해도 벌써 세 편이다. 정유미 주연의 <내 깡패 같은 애인> <옥희의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잇달아 개봉했다. 지난해에는 주연작 <차우> <첩첩산중> <그녀들의 방>을 비롯해 무려 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장편, 단편, 주연, 조연, 카메오 가리지도 않는다. 정유미는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이 캐스팅되는 여배우일 것이다.

이리 많은 영화에 출연할 줄 누가 예상했으랴

청춘의 찰나적 떨림을 잘 포착한 김종관 감독의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해사한 얼굴로 앳된 눈망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연방 뺨을 발그레 물들이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은 수줍고 서툰 짝사랑의 설렘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정유미가 아니었던들 아스라한 봄 햇살 같던 그 느낌을 어찌 전달할 수 있었으랴. 책갈피 사진 같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 이미지는 <사랑니>(2005)에서 입체화된다. 서른 살 주인공의 회상인 듯 존재하던 17살 조인영이 현재에 불쑥 나타났을 때, 관객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은 첫사랑을 추억하며 활용하는 장르물인 양 진행되던 영화가 사실은 첫사랑 판타지를 거부하고 불온한 현재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챈 데서 온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안온한 상상의 시공간에 있을 법한 소녀가 갑자기 과거·현재, 상상·실제의 장막을 뚫고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그녀의 불안하고 상기된 표정에서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정말 세상 끝 어디에선가 뛰어온 것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우왕좌왕 자주 핸드헬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났다. 관객은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소녀의 낙망에 아찔하게 교감했다.

<내 깡패 같은 애인>.

<사랑니>는 정유미에게 신인여우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백상예술상)을 안겼지만, 그때만 해도 정유미가 이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유미의 해맑은 눈매는 <미술관 옆 동물원> 시절의 심은하를 떠올리게 하고, 귀엽게 삐죽 내미는 듯한 윗입술은 <고양이를 부탁해> 시절의 배두나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이 난다. 이것은 양날의 칼이다. 정유미의 외모는 주목성이 없고, 관능성이 없고, 정형성이 없다. 그녀의 얼굴은 주위를 집중시키거나,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아우라를 발산하지 않는다. 말간 얼굴과 여린 몸매는 성적인 매력과 거리가 있으며,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또한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기대되는 안정감이나 노련함이 없이,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꽉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느껴진다. 그런 탓에 신인으로서의 풋풋함은 느껴지지만, 주연급 여배우의 위엄을 갖출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그대로 장점도 됐다. 주목성이 없는 얼굴은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관능적이지 않은 외모는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정형화되지 않는 그녀의 이미지는 비주류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 엉뚱하고 특이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그 결과 <가족의 탄생>(2006)에서 배타적 이성애 관계에 묶이지 않는 ‘헤픈 여자’라는 비전형적인 인물이 재현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본 적도 없고 상상된 적도 없는 캐릭터였지만, 정유미의 채연은 세상 어딘가에 저런 여자가 있을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족의 탄생>이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기이한 대안성’이 그녀의 몸을 통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가족의 탄생>에서 정이 많으면서도 자아가 굳건한 외유내강의 이미지는 이후 좀 다르게 변주된다.


<옥희의 영화>.

기이한 캐릭터, 있을 것 같은 기시감

여리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사회 변두리의 소외받는 루저이면서도 자신만의 꿈이나 오롯한 자존감 하나만으로 버텨내는 캐릭터들과 잘 맞는다.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 원조교제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나, <그녀들의 방>에서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번듯한 집을 꿈꾸는 학습지 교사나,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커리어우먼의 꿈을 놓지 않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은 모두 정유미의 외유내강 이미지가 활용된 예다. 그녀는 <그녀들의 방>에서 노숙자와 같은 위상에 놓이고,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3류 건달과 나란히 놓이지만, 그것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안쓰럽게 매달린다. 그녀들의 꿈은 허황되게 느껴지기보다, 현실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보인다. <그녀들의 방>에서 정유미는 자기 주검이 방치되는 것이 두려워 노숙자와 그녀를 집에 들인 친절한 아주머니의 죽음을 방기한 채, 주검과 더불어 큰 집에 사는 것을 택한다. 그녀의 ‘징그러운’ 욕망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던 건 정유미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절실함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다소 동화적인 해피엔딩도 흠결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정유미는 가난한 청춘의 표상으로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더 큰 공로는 3류 깡패 박중훈과의 언밸런스한 로맨스를 설득력 있게 만든 데 있다. 나이와 계층차가 큰 남자가 품는 미묘한 애정이 희화화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처럼 보이게끔 하는 여배우가 정유미 외에 누가 있을까. 이런 ‘정유미 효과’는 <차우>에서도 발휘된다. ‘B급 감수성’으로 충만한 엉뚱하고 괴팍한 영화 <차우>에서 윤제문이 정유미에게 반하는 것이 사심 없고 심지어 귀엽게 느껴진 것은 정유미의 맑고 편견 없어 보이는 특이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녀의 편견 없어 보이는 해맑음을 짓궂을 정도로 뒤집어 활용한 예가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다. 정유미의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얼굴은 어느 집단에나 한두 명씩 있는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여자를 표상한다. 그녀의 주위엔 ‘그녀의 예쁨을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구한 남자들이 꼬인다.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대학생 진구가 옥희에게 “네가 제일 예쁘고, 제일 똑똑해. 다른 애들은 다 유치해”라고 말하며 들이댄다. 왜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진구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나만 좋대.”) 그리고 그녀의 “유치하지 않은 똑똑함”이 바로 유치한 또래 남자들이 아닌, ‘나이 든 남자’를 향하게 돼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밤을 새운 진구를 이부자리로 불러 안아주면서, 동시에 교수와 속 깊은 정을 나눈다. 그녀는 오는 남자를 막지도 않지만 그 마음을 다 주지도 않는 다면적 욕망을 지닌 여자를 구현한다. 그녀의 다면적 욕망은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는 ‘내숭’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신의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몰입하며, 가식이나 계산 없이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조금만 더 가까이>.

우리는 무수한 ‘진구들’최근작 <조금만 더 가까이>는 순간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 그녀는 변심한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나타나, 모든 여자들이 속으로는 골백번을 더 되뇌었으나, 자존심이 상하고 망가지는 것이 두려워 감히 해보지 못한 모든 ‘진상’ 발언들을 토해낸다. “나 연애 불구 됐어. 넌 벌받아야 돼”라고 말하며, “밥 사달라, 같이 자자”고 매달린다. 그녀는 새로 만난 애인이 있지만, 그가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자 옛 애인에게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토록 모순된 욕망 앞에서 그녀는 거짓이 없다. “걔랑 안 되면 나 또 괴롭히러 올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오히려 미워할 수 없다.

충무로는 지금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정유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예쁨을 알아보았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진구들’이 그녀의 문 앞에 줄을 서는 중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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