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 만연한 성적 지상주의는 선수와 팬들의 지지를 받던 감독도 밀어낸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다음 시즌에는 볼 수 없게 됐다.연합 한상균
만년 하위 팀을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만으로 로이스터식 야구는 일단 성공작이다. 가까운 일본 프로야구와 비교할 때 최초의 외국인 감독과 한국 야구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은 1972~77년 주니치 드래건스의 월리 요나미네다. 요나미네는 하와이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1975년엔 조 루츠가 히로시마 카프에서 일본인 피가 섞이지 않은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 그러나 루츠는 한 달 만에 해고됐다. 1979년엔 한신 타이거스는 돈 블레이싱게임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블레이싱게임은 선수로 세 시즌, 코치로 9시즌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코치 시절에는 뛰어난 야구 식견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감독이 됐을 때 상황은 달랐다. 강훈련에 익숙한 코치와 선수들은 블레이싱게임의 느슨한 훈련 방침에 불만을 터뜨렸다. 구단은 신인 선수 기용 문제를 두고 감독과 대립했다. 언론은 선수단과 떨어진 호텔을 이용하는 그를 공격했다. 블레이싱게임은 결국 2시즌 만에 해임됐다. 1994년 지바 롯데 마린스는 미국의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 출신 바비 밸런타인을 연봉 60만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했다. 그는 만년 B클래스(4위 이하) 구단인 지바 롯데를 일약 퍼시픽리그 2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구단은 2년 계약을 한 그를 1년 만에 해고해버렸다. 일본식 ‘관리 야구’의 대명사인 히로오카 다쓰로 단장은 밸런타인의 자유분방한 리더십과 적은 훈련량을 대놓고 비판했다. 코치들을 규합해 감독 몰래 비밀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일본 야구에서 중시하는 희생 번트 사인을 거의 내지 않은 것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한 코치는 구단주에게 “감독의 미숙한 작전 구사 능력으로 15승을 손해 봤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밸런타인 감독 아래 지바 롯데가 전해보다 27승을 더 많이 거뒀다는 점은 무시됐다. 한국 야구와 사이좋았던 외국인 감독 로이스터 감독은 부임 3년째인 2010년에도 여전히 기자들로부터 훈련과 번트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롯데가 패할 때면 ‘한국식 야구’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방송 해설가도 있었다. 선수 기용에 의문을 나타내는 코치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심각한 갈등은 아니었다. 선수를 존중하는 리더십은 선수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준PO 최종전을 앞두고 롯데 선수들은 “감독 재계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했다. 김경문 두산 감독은 준PO 기간에 “롯데의 공격적인 스윙은 우리 선수들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효봉 MBC Life 해설위원은 “SK의 성공 이후 김성근 감독식의 강훈련과 작전 수행 능력, 불펜 운영을 중시하는 야구가 대세가 됐다. 하지만 야구에 정답은 없다. 로이스터 감독은 ‘야구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에게서 2011년 지휘봉을 앗아간 건 그가 이질적인 외국인 감독이어서가 아니다. 어느 나라 프로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성적 지상주의가 문제였다. 롯데 외국인 선수 라이언 사도스키는 “한국 구단들은 인내심이 적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메이저리그가 더 심하다”고 말했다. 명문 뉴욕 양키스는 1975~82년에 감독을 무려 아홉 차례나 교체한 적이 있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2년 안에 우승을 해야 한다”는 말로 감독 교체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롯데를 ‘2년 내 우승 전력’으로 평가하는 야구계 사람이 적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최민규 <일간스포츠> 기자 didofido@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