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 더욱 넓어진 스릴과 두뇌싸움의 지평… 도사급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걸작들
최근 새로운 CD가 하나 나왔다. CD 안에 담긴 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CD의 이름은 ‘직지 프로젝트’. 옛 우리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직지심경을 기리는 것일까? 아니다. CD에 들어 있는 내용은 바로 SF(Science fiction). 바로 ‘공상과학소설’이다.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초등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출판사 아이디어회관의 ‘아이디어문고’다. 아이작 아시모프 등 SF계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았던 이 시리즈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SF란 단어를 친숙하게 했던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한때의 유행도 사라지고…
한참 전에 절판된 이 문고판을 SF팬들이 자료집으로 남기고자 했고, 그래서 SF동호회 회원들은 한두권씩 남아 있는 이 문고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문고판을 스캔받았고, 동호회원끼리 나눠 갖기 위해 CD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도 하나 있었다. 이 CD를 계기로 SF소설 마니아들을 결속하고 궁극적으로 국내에 SF 열기를 조성하자는 원대한 꿈이 바로 이 ‘직지 프로젝트’에 들어 있었다.
수많은 장르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색다른 취향이 금세 경향으로 반영되는 문학시장에서 유달리 죽쑤는 장르 두 가지가 있다. 모두 전세계적으로 존재하고 역사도 오랜 장르지만, 유달리 우리 시장에서는 힘을 못 쓰는 장르들이다. 바로 ‘SF’와 ‘추리’소설이다. 이 두 장르 소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어 얼핏 친숙해보이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모두 처참한 실적으로 바닥을 긴다. ‘직지 프로젝트’는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SF팬들의 자발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장르가 모두 한국시장에서 소수파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추리소설과 SF의 붐은 만만치 않았다. 1970∼80년대에만 해도 이 두 장르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양에서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불리는 추리소설은 90년대 초반 한때 붐을 일으켰다. 김성종, 이상우씨를 비롯한 작가들이 고정적으로 책이 나올 때마다 10만부를 팔았을 정도로 고정팬을 거느렸고, 그래서 추리전문 출판사도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인기는 사그라졌다. 지금은 신작 추리소설이 한해 몇권도 나오지 않을 정도가 됐다. 현재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 작가는 70여명. 그러나 이 가운데 최근까지 책을 주기적으로 내는 작가는 불과 10명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검은별>과 <마인>으로 한국 최초의 추리작가란 칭호를 얻으며 한국 추리소설계를 이끌었던 김래성 시대에도 못 미칠 정도다. 게다가 한때 어린 시절에는 으레 셜록 홈스와 괴도 루팡을 줄줄 욀 정도로 추리소설을 읽었던 유행도 사라졌다. 이제 어린이들은 추리소설 대신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 같은 외국 추리만화에 더 빠지는 시대가 되었다.
SF도 마찬가지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SF의 고전인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의 명작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출판사들은 SF란 장르 타이틀이 붙으면 워낙 책이 안 팔리다보니 분명 SF소설인데도 그냥 문학서적처럼 낼 정도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소설 <쥬라기 공원>도 SF란 수식어를 달아도 됐지만 출판사에서는 ‘사이언스 드릴러’란 말로 포장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 소개되는 해외의 유명 SF작품들도 한해 한두권에 불과할 정도로 시장 자체가 미미해진 지경이다.
엽기적인 세상, 추리소설의 부진
사실 추리소설과 SF를 한 묶음으로 싸잡는 분류법은 어찌 보면 불합리한 것 같지만, 이 두 장르는 늘 한 세트처럼 취급돼왔다. 원래 일본시장에서의 분류법이 국내에 들어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두 장르의 운명이 거의 같이 부침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두 장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찬밥 대접을 받는 것일까.
추리소설의 경우 한국 추리소설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유로 추리소설의 부진을 설명한다. “우리 사회가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 많고 정치권을 비롯 모든 분야의 돌아가는 상황이 추리소설보다도 더 복잡하고 기묘하게 꼬여 있어요. 그러다보니 현실이, 신문기사와 9시 뉴스가 추리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지경입니다. 우스운 분석 같지만 그런 탓이 정말 크다고 봅니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수광 사무국장의 분석이다.
국내 몇명 안 될 정도로 드문 추리소설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광규씨는 대중의 취향과 작가의 책임 모두를 이유로 든다. 일단 대중문학작품에 대해 사람들이 무시하는 경향과 함께 좋은 국내 추리작품이 나오지 않는 현실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추리소설계는 김성종씨 혼자서 너무 독주를 해왔고, 때문에 김성종씨류의 추리물만이 양산돼 제살 깎아먹기를 한 탓도 크다는 지적은 추리소설계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한 국내 추리물들이 만화가게, 즉 대본소용 성인오락물로만 나오다보니 비슷비슷한 스릴러 줄거리에 중간중간 에로틱한 요소를 최대한 집어넣는 도식적 구성으로만 나왔고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한국 추리물=심심풀이용 3류소설’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었다.
SF의 부진은 어떤 탓일까.
기본적으로 SF를 즐기는 문화 그리고 좋은 SF작품이 나오는 사회의 수준은 그 사회의 과학적 수준과 직결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한때 세계 과학을 이끌었던 영국이 SF 발아기의 주역이었고, 지금은 그 중심이 미국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라고 SF전문가들은 말한다. 과학 수준이 아직도 경제력에 비해서 한참 처져 있는 우리나라의 여건상 괜찮은 SF작품이 나오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SF해설가이자 대중적인 과학칼럼을 쓰는 전문작가인 박상준(34)씨는 “아직까지 우리 독서시장의 수준이 외국에 못 미치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는 전제로 “그동안 국내에서 나온 창작 또는 번역 SF책들이 모두 조악한 장정과 디자인으로 싸구려란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또한 SF소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너무 어렵다는 것과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선입견도 이처럼 SF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추리소설과 SF는 누구나 즐기는 보편적인 문학 장르이기보다는 소수의 극성팬을 거느리는 ‘마니아’ 장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이유보다는 다소 막연한 선입견과 오해로 이 두 장르가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SF와 추리소설마니아들은 그런 오해를 깨고 한번 접해보면 그 매력을 알 것이라고 충고한다. 한마디로 “이 재미있는 것을 왜 보지도 않고 무시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변화와 시도
이 두 장르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대중성’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비록 마니아 코드로 받아들여지지만 애초부터 이 두 장르는 모두 어린이용이라기보다는 성인용으로 시작됐고, 그래서 한번 맛을 들이면 계속해서 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애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한 두 장르의 핵심적인 매력이 이제는 다른 문화 장르에서 더 많이 차용되는 것도 이런 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령 추리소설은 꼭 소설이 아니라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진 탓에 소설이 저절로 부진하게 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반면 SF는 다른 장르와 유달리 구분되는 것이 장르의 특성이어서 사전지식이나 과학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읽기 힘들고 재미를 못 느끼는 한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만, 역시 좋은 SF소설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그 저변은 되레 더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국내외 추리소설과 SF는 그동안 책을 멀리했던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많은 변화와 시도들로 새로운 변화를 담고 있다. 추리소설 하면 당연히 탐정이나 스파이가 나오는 시대는 지났고,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로 예전 추리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소설들이 요즘 추리소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과거의 탐정이나 밀실트릭은 사라졌지만 대신 훨씬 다양한 소재들이 다뤄지면서 지평은 넓어졌다. SF도 마찬가지다. 이름에 ‘과학’이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 과학을 소재로 삼는 경향은 지났다. 마법을 과학적으로 이용한다든지, 역사의 가정법에서 새로운 시간줄기로 따로 벗어났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를 다루는 대체역사소설까지 갈래가 다양하다.
이런 변화와 함께 추리소설과 SF는 다시 떠나간 독자들에게 조용히 손짓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여름이다. 더운 여름밤 수박 한쪽 베어물고 모처럼 독서에 빠지고 싶다면, 그리고 그동안 읽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소설에 빠져보고 싶다면 이들 두 장르를 한번 시도해보자. 아직도 많은 이들에겐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올 여름, 추리물과 SF를 경험해보고픈 독자들을 위해 <한겨레21>은 이쪽 분야의 ‘도사급’들을 찾아 추천작을 받았다. 모두 이 장르 역사에서 꼽히는 걸작이거나, 요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입문자용 소설들이다. 그리고 시중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거나 주문 가능한 것들로 골랐다.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두뇌싸움, 아니면 재미있게 읽으면서 과학상식도 덤으로 얻는 것. 그것도 한번 경험해볼 만하지 않을까.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수많은 장르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색다른 취향이 금세 경향으로 반영되는 문학시장에서 유달리 죽쑤는 장르 두 가지가 있다. 모두 전세계적으로 존재하고 역사도 오랜 장르지만, 유달리 우리 시장에서는 힘을 못 쓰는 장르들이다. 바로 ‘SF’와 ‘추리’소설이다. 이 두 장르 소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어 얼핏 친숙해보이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모두 처참한 실적으로 바닥을 긴다. ‘직지 프로젝트’는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SF팬들의 자발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SF소설을 영화화한 <스타쉽 트루퍼스>.

사진/ 추리영화 <몰타의 매>에서 주연을 맡았던 험트리 보가트.

사진/ “셜로키언을 아시나요?” 셜럭 홈스의 팬들은 여전하다. 셜록 홈스 박물관.

사진/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자칼>에서 주인공 킬러역을 맡았던 브루스 윌리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