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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정 없는 세상, 고뇌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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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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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총각 딱지 떼기’로 일관, 시간 죽이며 읽기엔 적합한 작품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과는 무관하게 제 깃털만 긁어대고 있다, 라고 쓰면 알 만한 독자들은 유쾌하게 웃을 것이다. 상투화된 금언을 비트는 데서 오는 낯섦 때문이다. 이 유쾌함이 언제부턴가 우리 소설을 장악하고 있다. 유쾌함으로 치자면 성석제를 따라갈 사람이 없지만 만일 유쾌함이 아니라 ‘가벼움’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많은 젊은 작가들이 어깨동무하면서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이 2001년 우리 소설판의 현실이다. 이제 또 한 사람의 유쾌하고 가벼운 소설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가의 등장을 두고,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중견평론가로부터 이제 막 평필을 휘날리기 시작한 신예평론가까지 유쾌한 ‘호평’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비평가들의 과도한 찬사

이 민감한 얘기는 뒤에 하기로 하고, 해당 작품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제6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당선작인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이 그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들이 아무 부담없이 시간을 죽이면서 읽기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점에 있다. 한마디로 재미있다. 물론 이것은 작가를 모욕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읽으면서 스스로 놀랐다. 제일 처음 소설을 구상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는 소설이 나왔던 것이다.” 나도 놀랐다. 신인작가에게서 보임직한 글쓰기에 대한 엄숙한 다짐은 간 데 없고, 자기 소설의 재미에 빠져 있는 이 유쾌하며 앙증맞은 나르시시즘이라니.


이 소설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의 투쟁”을 벌이는 10대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 속의 10대에게 섹스는 어른됨의 확실한 통로로서 제시되는데, 때문에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만나면 “한번 할까?”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곤 한다. 섹스가 완료되면 이 소설도 끝을 맺고 작중인물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물론 그것은 이 소설의 치명적인 한계로 남는 부분이다. 왜 그런가?

성장소설이란 범주와 관련없이 10대들의 성을 다룬 작품들은 90년대 이후 다량 생산된 바 있다. 그 선두에 선 작품이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이며, 이와는 좀 다르지만 임영태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백민석의 <내가 사랑한 캔디>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 작품 속에서 10대들의 섹스는 자아의 ‘존재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장정일의 10대들이 예술에 대한 모던한 탐닉을 관통하면서 자아를 찾아간다면, 임영태의 10대들은 지방의 실업고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소외의 존재론’을 부각시킨다. 백민석에 오면, 확연하게 그 의미가 변형되는데, 게이(gay)의 존재론, 다시 말해 성정체성(sexual identity)의 문제가 중심테마로 설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정 없는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론적 고뇌가 아닌 ‘총각 딱지 떼기’로 일관된다. 미숙한 아이는 동정(童貞)의 능동적인 상실 이후에도 여전히 미숙한 존재로 남아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인데, “탈근대적 성장소설”(김형중), “독특한 성장소설”(도정일), “상큼한 재능”(황종연)이라는 과장된 ‘찬사’가 남발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박완서의 다음과 같은 따끔한 조언이 작가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건 이 작가가 버릇들이면 안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의 고언을 첨부하고 싶다. 가볍다는 것도 문제지만 10대들의 절실한 삶의 ‘고뇌’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10대들의 섹스에도 깊은 고뇌가 잠복되어 있다. 동정없는 세상에서, 고뇌없는 소설을 읽는 일은 결코 유쾌한 체험이 아니다.

다음 작품을 벌써부터 기대하는 이유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문제점이 오직 이 작가에게만 국한되는 사항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등단 당시에는 평단의 폭넓은 기대를 모았던 하성란, 전경린, 은희경과 같은 작가들의 최근 소설들 역시 이러한 문제점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황석영, 박완서, 김성동으로 대표되는 중견작가들의 최근 소설들은 중후한 향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따뜻한 방관’과 ‘미묘한 부추김’이 한몫을 하고 있다. 고뇌하지 않는 비평가들이 ‘비판없는 비평’만을 남발한다면 그 결과는 문학의 하향 평준화일 뿐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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