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돔의 맛, 생명의 맛, 바다의 맛
등록 : 2010-07-13 17:04 수정 : 2010-07-15 16:53
참돔의 맛, 생명의 맛, 바다의 맛. 한겨레 고나무 기자
칼을 얻었다. 이제 문제는 ‘무엇을 날로 먹을까’였다. 6월 중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자실에서 주섬주섬 노트북 가방을 싸면서도 머릿속엔 날로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돌이켜보면 참 많이도 날로 먹었다. 자주, 그리고 아주 많이, 날로 먹었다. 물론 얄팍한 지갑 때문에 날로 먹힌 녀석은 대부분 사람 손으로 기른 광어였지만.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길러서 다른 사람이 날로 먹게 썰어준 광어를 먹어왔다. 이번엔 내 손으로 날로 썰어 먹기에 도전한다.
이런 도전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처음 겪는 상황에서 본능에 기댄다. 바닷물 염도는 양수와 비슷하다고 들었다. 남쪽 섬에서 태어난 내가, 내 손으로 처음 날로 먹을 놈은 역시 바다 생선이었다. 메트로폴리탄에 갇힌 섬 여의도 지하철에서 출발한 내 발이 마포농수산물센터로 향한 것은 본능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태반을 걷어찼던 그 본능.
서울 마포의 상암월드컵경기장 바로 앞에 농수산물센터가 있었다. 밤 10시10분에 불 켜진 가게는 딱 하나였다. “참돔으로 하세요. 1kg에 3만원 쳐드릴게.” “참돔 주세요.” 2㎏짜리 참돔 한 마리를 5만원에 받기로 흥정했다. “매운탕거리도 같이 드리면 되죠?” “저… 혹시… 회 안 뜨고 그냥 주셔도 되는데요….” 회칼을 잡고 있던 가게 주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저기, 뭐하시려고요?” “아… 요리 공부하는 후배가 회를 떠보고 싶다고 해서요.”
밤, 골목을 달리는 마을버스 뒷자리에는 내 손에 들린 비닐에서 나오는 비린내가 흘러다녔다. 집에 돌아와 봉지째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까무룩 잠 들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 전까지 잠든 건 다행이었다. 잠든 게 다행임을 회칼로 참돔의 살을 떼어냈을 때 곧장 알았다.
참돔의 껍질은 두꺼웠다. 회칼을 쥐고 칼끝으로 생선 둘레에 칼집을 냈다. 쉽지 않았다. 힘 조절이 쉽지 않았다.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겨우 벗긴 껍질 아래 투명한 살이 드러났다. 상온 7℃의 냉장고에서 8시간 숙성된 살이다. 떨리는 손으로 살점을 떼어냈다. 무라카미 류는 부드러운 게살 수프의 식감을 이렇게 묘사했다. “눈송이가 겨울 바다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혀에 닿은 참돔 살은 찹쌀로 갓 찐 송편의 부드럽고 존득한 식감과 똑같았다. 숙성을 시켰기 때문임을 나중에 알았다.
무릎을 망치로 건드릴 때처럼, 내 혀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서울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서 어깨너머로 소 해체를 본 나는 마구잡이로 참돔을 해체했다. ‘아가미 뒤쪽 살 위에 칼을 대고 척추까지 썰어 내려간다’는 회뜨기의 원칙은 그러므로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해체 순서와 상관없이 날로 먹는 살은 맛있었다. ‘생명을 먹는 것 같다’는 무라카미 류의 표현을 빌리지 않고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맛있었지만 나는 넉 점을 먹고 대바를 내려놨다. 바다의 맛 때문에 자꾸 고향 섬의 파도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번에 도전할 음식은 누군가와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출근 준비에 부산을 떨었음은 물론.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