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에서 독일과 스페인은 심리훈련 프로그램의 덕을 톡톡히 봤다. 7월8일(한국시각) 월드컵 준결승전 스페인-독일 경기가 끝난 뒤 스페인의 푸욜(뒤 왼쪽)과 독일의 클로제가 손을 맞잡고 있다. REUTERS/ MATT DUNHAM
스포츠심리학은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박찬호를 통해 국내 스포츠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일이다. LA 다저스 시절 극심한 부진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박찬호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하비 도프먼 박사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 슬럼프를 극복하고 제 기량을 되찾은 적이 있다. 당시 도프먼 박사는 “자신 있는 공을 던져 홈런을 맞았을 때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법을 알아야 한다”며 다양한 접근법과 반응법을 통해 박찬호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성적 향상을 넘어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미국프로농구(NBA)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에서도 스포츠심리학자의 존재는 일반화됐고 유럽도 스포츠심리학을 크게 지지하고 있다. 지난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독일과 스페인 등이 심리학자와의 심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의 자신감과 기량 회복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특히 독일 선수들의 정신력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데, 그런 모습은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전 4-0 대승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축구에서의 정신력이 무조건 열심히 뛰는 파이팅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 요소에 주눅 들지 않고 냉철한 마음을 유지하며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자세가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정신력이다. 독일이 이런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 반면, 심리 조절 능력이 취약한 북한은 작은 충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며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스포츠심리학자나 심리 코치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 같은 대형 구단은 말할 것도 없고 포츠머스 같은 소규모 구단에서도 심리 전담 코치를 둔 것을 볼 수 있다.
구단과 함께 일하는 스포츠심리학자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이 불안감을 해소하고 최적의 상태로 경기에 임할 수 있게 돕는다. 주된 도구는 선수와의 심층 대화지만 각종 시청각 자료도 활용된다. 최근에는 단어 연상 게임 등을 통해 선수들의 생각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끄는 시도도 있다.
스포츠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 성적 향상만은 아니다. 고민과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에게만 도움되는 것도 아니다. 스포츠심리학은 경기에 접근하는 자세, 올바른 경쟁관, 페어플레이 정신을 심어줘 더 나은 운동선수, 그리고 인격체로 성장하게끔 유도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프로배구와 여자축구 등에서 심리상담 및 치료사로 활동하는 인하대 윤혜선 박사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스포츠심리학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위 팀 2군에서도 존재감이 미약한 선수를 갑자기 대표급 선수로 키워내는 게 스포츠심리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스포츠심리학은 한 인간에 대한 접근이에요. 1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수들이 그라운드 안팎의 삶에서 행복을 찾게 도와주는 거죠. 우리나라의 스포츠 훈련은 너무 신체적인 것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죠. 이는 꼭 경기장에서의 창의력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 패배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정신력의 일부거든요. 태클을 한 번 해도 철학과 이성이 필요합니다. 제 심리훈련은 그런 것을 함께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상담’이라는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상담실’은 집단따돌림, 뒤처지는 학업 혹은 어려운 환경으로 고통받는 친구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심리치료’ ‘심리상담’이 사람들에게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정신병’ ‘우울증’ 등의 단어와 맞물린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수도권의 한 구단에서 활동하던 올림픽 대표 출신 선수가 심리상담을 받는다는 이유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또라이’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동료들의 시선에 극도의 수치심과 부담감을 느꼈고, 결국 심리훈련을 포기해야 했다.
일선 감독들도 심리학자라는 외부인이 팀 내부를 들여다보는 걸 꺼린다. 스포츠심리학자의 처방이 팀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 사례가 있지만 지도자들은 현장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인지 그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 김연아가 스포츠심리학에 관심을 보이고 박태환·장미란 등의 스타가 심리학자와의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리 체육계의 시선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개인 종목 선수는 물론이고 팀 차원에서 스포츠심리학자를 고용해 선수들의 안정과 경기력 향상을 꾀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프로 야구·축구·배구를 비롯한 다양한 종목에서 스포츠심리학자들이 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다만 지속적인 심리훈련보다는 일회성 특강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아쉽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스포츠계의 폐쇄성이다. 많은 스포츠심리학자가 선수와 좀더 가까이서 대화하고 분석하기 위해 훈련장과 숙소 출입을 원했으나 ‘어딜 감히 들어오나’라는 일선 지도자들의 문전박대에 발걸음을 돌린 일화가 많다.
“선수는 운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윤혜선 박사는 말한다.
“그래도 지난 2~3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선수들이 스포츠심리학의 기능과 효용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요. 이제는 감독의 마인드가 변할 차례입니다. 선수를 운동하는 기계가 아닌 한 인격체로 생각한다면 이 학문이 현장에 접목되기가 한결 수월해질 거예요. 선수들을 돕고 싶어요. 1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행복하게 운동하도록 지원하고 싶어요.”
한국 스포츠의 기반시설, 인적자원, 훈련기술 등은 선진국에 크게 뒤질 것이 없다. 단기간에 성적을 끌어내는 능력과 노하우는 어떤 스포츠 강국보다 낫다. 그러나 우리 체육은 선수를 한 인격체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게을리해왔다. 스포츠심리학의 본격적인 접목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