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꼬부라지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이에 관한 역사적 명상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안 국민투표가 통과된 직후인 1969년 11월8일,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43살(우리 나이)의 김영삼은 남산의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른바 3김씨의 시대를 여는 40대 기수론이 처음 제창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김대중도 1970년 1월24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김대중은 당시 두드러진 의정활동을 보이고 있던 3선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5대 의원의 경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이틀 만에 5ㆍ16 군사반란이 일어나 의사당에 등원도 못해보고 끝났기 때문에 사실상 재선의원이었고 주요 당직이라고는 대변인밖에 지낸 적이 없었다. 이어 5ㆍ16 뒤의 정치규제에 묶여 있다가 뒤늦게 신민당에 입당한 1922년생의 이철승(李哲承) 역시 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70년, 40대 대통령 후보들의 각축
40대 기수론은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위계질서가 엄격한 전통야당의 세대교체를 강제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먼저 1971년 선거에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연시되던 유진오(兪鎭午) 당수는 3선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고 얼마 뒤 뇌일혈로 쓰러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申翼熙) 후보가 급서하고, 1960년 선거에서는 조병옥(趙炳玉) 후보가 또다시 사망한 데 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유력후보가 발병하는 불행한 징크스가 재현된 것이다. 당시 신민당 내 실력자는 부총재 유진산(柳珍山)이었는데, 그는 1964년 이른바 진산 파동을 통해 왕사꾸라의 별명을 얻은 인물로서, 도저히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박정희의 공화당은 상대적으로 야당인 신민당에 비해 젊었다. 먼저 1917년생인 박정희는 당시 53살이었고, 당과 정권의 주요 인물들도 대개 40대에서 50대였으며, 이동원(李東元) 등 30대를 장관에 발탁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야당이 유진산처럼 나이도 많고- 유진산은 1969년 ‘겨우’ 65살로 현재의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씨보다 두살이나 아래이다- 이미지도 안 좋은 사람을 후보로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단 공화당뿐이 아니라 사회도 젊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인구 비율로 40대 미만이 전체의 80%를 넘었고, 사회의 주요 부분에서 40대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젊은 야당의원 시절 김대중씨는 40대 기수론을 정당화하면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천주교조차 40대의 김수환씨가 불과 2년 안에 많은 연상 선배를 제치고 신부에서 주교, 대주교, 그리고 세계 최연소의 추기경 전하에까지 대진출”한 사례를 들었다. 40대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을 부르짖으며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하자 당 원로와 중진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특히 세대교체의 대상으로 지목된 유진산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즉 아직도 입에서 젖비린내나는 어린 것들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대통령 후보를 세대문제와 결부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미성년자의 사고로 묵과할 수 없다”며 펄펄 뛰었지만, 일반당원들과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1970년 9월29일 열린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지명 전당대회는 40대 후보 3인의 각축으로 이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유진산의 지지를 얻은 김영삼이 느긋하게 후보지명 수락 연설문을 다듬고 있는 동안 김대중은 일반 대의원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9월29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지명에 필요한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대역전극은 2차 투표에서 일어났다. 김대중의 후보지명 획득이었다. 김대중은 1971년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선전했으나 지역감정과 금권, 관권을 동원한 박정희에게 94만표 차이로 아깝게 졌다. 그로부터 30년, 세대교체를 부르짖으며 등장했던 40대 기수들은 그들이 교체하려 했던 노장층의 나이를 10여살 이상 넘기고도 80살을 바라보며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김종필, 50대 초반에 정풍의 표적이 되다
이른바 3김 시대 또 하나의 주역 김종필은 요즈음 JP 대망론을 자가발전하면서 ‘왕기’가 서린 땅으로 부모의 묘지를 이장했다. 김종필은 1926년생, 1961년 군사반란 당시 36살의 청년이었다. 김종필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0년 그가 군부 내의 정군(整軍)운동과 이른바 하극상사건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은 군복을 벗었지만 송요찬(宋堯讚), 백선엽(白善燁), 최영희(崔榮喜) 등 군 수뇌부 역시 퇴진했다.
당시 김종필 등 육사 8기는 육사 1기와 기수로 많이 차이가 나지만 교육을 받기 시작한 날짜를 기준으로는 채 3년의 차이도 나지 않았다. 그들보다 3∼4살 많은 사람들이 별을 주렁주렁 달고 육군참모총장이다 연합참모총장이다 하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때 8기생들은 대개 육군 중령으로 극심한 인사정체를 겪고 있었다. 5ㆍ16에 가담하여 최고회의 의장을 지내다가 뒤에 축출된 장도영(張都暎)만 하더라도 38살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으나 4살 아래인 김종필로서는 언제 별을 달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터였다. 물론 5ㆍ16 군사반란의 원인을 이런 인사불만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김종필 등이 군사반란에 성공하자 당연히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5ㆍ16 당시 박정희가 45살, 김종필이 36살이었는데, 최일남(崔一男)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5ㆍ16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자기들 늙는 줄은 모르고 50살 넘은 사람들을 ‘밖에 나가 놀라’고 고려장 치르듯 내몰았다.” 그리고 이렇게 나이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젊은 군인들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4대의혹사건을 일으키며 박력있고 통크게 해먹기 시작했다. ‘구악일소’(舊惡一掃)를 명분으로 내건 반란의 주역들이 ‘구악’과는 양과 질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신악’(新惡)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란 말도 나오고 배부른 늙은 늑대와 사는 것이 배고픈 젊은 이리와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인생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정군과 하극상으로 일어선 청년 김종필은 채 40살이 되기 전에 신악의 주역이 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는 그가 만든 공화당 내에서 정풍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그랬던 김종필이 이제 80살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아남아 “노목(老木)을 건드리면 신의 노여움을 탄다”고 몽니를 부리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 가뭄에” 골프를 치며 골프 못쳐 병이 나면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기억하는가? 그가 몰아내고자 한 기성세대, 예컨대 송요찬, 최영희, 백선엽 등의 나이는 40대 초반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장유유서의 질서가 엄격한 사회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장유유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와 장치가 있었다. 한 예로 지금은 1년만 차이가 나도 선후배를 깎듯이 따지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노론(老論)은 8년, 소론(少論)은 9년 하는 식으로 거의 10년 터울이면 친구로 지내는 평교(平交)를 맺었다. 이는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맞먹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근 10년 사이에 평교가 허락되다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홍명희(洪命熹) 선생은 장가를 일찍 들어 큰아들 홍기문(洪起文)과는 열여덟살 차이였다. 그래서 홍명희와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홍기문과도 말을 놓고 지내 여럿이 모인 자리에 가면 부자지간에 다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적어도 1950년대까지 이어져 당시 회고록을 보면 6∼7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을 친구로 부르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10년 터울도 말을 텄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질서가 잡힌 사회였지만 젊은 층의 진출과 활동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사나이 20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뒷날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시를 남겨 스무살 안팎 수험생들의 기를 팍팍 죽게 만드는 남이(南怡) 장군은 28살에 병조판서가 되었고, 조광조(趙光祖)도 30대에 지금의 감사원장격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물론 이들의 지나친 출세와 급격한 세대교체 요구는 기성세대의 반발을 사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조선시대에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겨 성과를 본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한 예로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은 조선시대에 영의정보다 더 권위있는 벼슬로 학문적 성취의 상징인 대제학(大提學)을 30대 초반에 지냈다. 1961년에 김옥길(金玉吉)은 갓 마흔에 이화여대 총장이 되었지만 현재 그 나이는 인문학분야 초임교수의 나이이다. 열여섯 춘향의 사랑은 우리 고전의 자랑이 되었지만 동갑내기 빨간마후라는 철부지 어린 아이의 도덕적 타락으로 낙인찍혔다.
또 조선시대에는 치사(致仕)와 기로소(耆老所)라는 제도가 있었다. 치사란 나이가 70살이 되면 벼슬에서 자원해서 물러나는 것인데, 지금의 정년제도처럼 하위직에는 엄격하고 고위직에서는 좀 융통성이 있었다. 70살이 되면 모두 벼슬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도리였고, 자리에 연연하여 물러나지 않으면 염치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즉 치사를 하면 치사(致仕)하신 원로대신으로 존중을 받지만, 자리에 연연하면 노추를 부리는 ‘치사’한 놈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수광(李粹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나 이익(李翼)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이가 많다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예가 드물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치사제도가 그렇게 잘 지켜진 것만은 아니다. 기로소제도는 과거에 급제한 문신으로 관직은 장관급인 정2품 실직을 지낸 자 중에서 70살이 되면 기로소에 들게 하여 우대한 제도였다. 그러나 기로소에 들었다고 모두 물러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런 제도를 둔 것은 나이든 사람들을 높이면서도 젊은 층의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70살이 되면 실제 물러나지 않더라도 사직소를 올려 물러나는 시늉은 해야 했다.
일제시대 3대 일간지 편집국장은 모두 20대
개화기나 일제 강점기는 민족의 암흑시대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젊은이의 양지였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34살, 박영효는 24살, 서재필은 19살이었다. 갑오개혁의 주역 유길준은 40살이었고, 독립협회 당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은 30대 초반이나 중반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청년층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45살, 각료들도 대개 그 또래였다. 민족진영의 활동, 특히 지식인들의 유일한 출구였던 언론계는 더욱 젊었다. 한말 신채호가 필명을 드높이던 시절 그는 20대 후반이었고, 최남선은 10대의 마지막 해에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열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그 동인들은 다 20대였다. 지금으로서는 수습기자 되기도 힘든 20대 초반에 <동아일보> 편집 겸 발행인을 지낸 이도 있고, 당시 3대 일간지의 편집국장은 거의 20대 후반이었다. 이광수가 32살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것은 오히려 당시로서는 늦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언론계는 역시 젊었다. 35살에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장기영은 37살에 조선일보 사장, 39살에 한국일보 사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같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 주요 일간지의 편집국장은 다 40대 초반이 지냈다. 군은 더 젊어서 정일권이나 백선엽이 별 서너개를 달고 3군총사령관이요 참모총장이요 하는 자리를 차지한 것은 30을 갓 넘긴 때였다. 개화기 이래 이런 젊은이의 전성시대는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전통교육을 받은 세대는 제국주의의 격랑에 휩쓸려 사라졌고 신교육을 받은 홍안의 소년들은 자신의 역량보다 버거운 짐을 져야 했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41살 때였다. 그런데 그보다 거의 곱절이나 나이를 더 먹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귀거래사>가 아니라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며 신발끈을 조여맨다. 40대 기수론의 주역들은 오늘날 노인정치의 주역이 되어 건강을 뽐내고 있다. 1999년 정부가 교원 정년을 65살에서 62살로 단축하는 정책을 강행하여 논란이 벌어졌을 때, 70대 후반의 대통령과 총리(김종필)가 그들보다 더 나이가 든 당대표(서영훈)와 함께 정년 단축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모습은 그 정책에 찬성하는 필자가 보기에도 서글픈 코미디였다. 흔히 우리 사회에 존경할 만한 원로가 없다고 하지만 80살이 되도록 다 진흙탕에서 현역으로 뛰는 데, 한발 물러나 경륜과 온축된 지혜를 전해주는 원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의 한 신문기고문은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가 참담한 심경을 고백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학생으로 김대중 후보의 운동원으로 뛰었던 사람이었다. 이제 며느리를 본 반백의 처지에서 며느리에게 왜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를 역설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꽉 막힌 한국현대사의 축소판 같아 그렇게 서럽더라고 그는 토로했다. 전혀 세대교체를 하지 못한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 때만 되면 무슨 흡혈귀 마냥 “새 피! 새 피!” 하며 혈안이 되곤 한다.
세대교체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나이만으로 세대교체를 강제할 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 땅의 젊은 세대 역시 권위주의와 위계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임에도 선후배를 따지고 기수를 따지는 행태는 패거리문화, 지역주의, 학벌주의와 함께 날로 심해지고 있다. 20년 전 필자의 대학시절보다 현재의 대학가에서 선후배관계는 더 엄격하고, 90년대에는 70∼80년대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배의 후배 얼차려 주기까지 발생했다. 20대 초반에도 처음 만나면 “주민증 까봐”가 유행이고, 우스개겠지만 복무기간이 짧은 방위는 오전 입대냐 오후 입대냐를 따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랫기수가 총장이 되면 선배는 물론 동기들까지 옷을 벗는 것이 오랜 관례가 된 검찰조직을 보면 세대교체가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또 이른바 386 정치인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고, 술자리에서 ‘가방모찌’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의 ‘가방모찌’가 되지 못해 안달해 우리를 아연하게 만든다.
세대교체는 때로 필요하지만 너무 급격한 세대교체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너무 젊은 사람들, 그것도 나이만 젊었지 마음은 젊지 않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그대로 뭉개고 앉아 건강을 뽐내면 대책이 없다. 그들의 건강과 장수야 본인과 그 가족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겠으나 전체 사회를 위해서는 대체로 큰 불행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꼬부라지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회야말로 권위주의의 온상이 된다.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 땅의 40대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대로 다들 자기 나이를 잊고,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못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노병들의 전성시대가 낳은 비극이 아닐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귀거래사는 없다.” 40대 기수론의 주역들은 오늘날 노인정치의 주역이 되어 건강을 뽐내고 있다.(이용호 기자)
또한 박정희의 공화당은 상대적으로 야당인 신민당에 비해 젊었다. 먼저 1917년생인 박정희는 당시 53살이었고, 당과 정권의 주요 인물들도 대개 40대에서 50대였으며, 이동원(李東元) 등 30대를 장관에 발탁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야당이 유진산처럼 나이도 많고- 유진산은 1969년 ‘겨우’ 65살로 현재의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씨보다 두살이나 아래이다- 이미지도 안 좋은 사람을 후보로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단 공화당뿐이 아니라 사회도 젊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인구 비율로 40대 미만이 전체의 80%를 넘었고, 사회의 주요 부분에서 40대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젊은 야당의원 시절 김대중씨는 40대 기수론을 정당화하면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천주교조차 40대의 김수환씨가 불과 2년 안에 많은 연상 선배를 제치고 신부에서 주교, 대주교, 그리고 세계 최연소의 추기경 전하에까지 대진출”한 사례를 들었다. 40대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을 부르짖으며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하자 당 원로와 중진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특히 세대교체의 대상으로 지목된 유진산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즉 아직도 입에서 젖비린내나는 어린 것들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대통령 후보를 세대문제와 결부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미성년자의 사고로 묵과할 수 없다”며 펄펄 뛰었지만, 일반당원들과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1970년 9월29일 열린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지명 전당대회는 40대 후보 3인의 각축으로 이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유진산의 지지를 얻은 김영삼이 느긋하게 후보지명 수락 연설문을 다듬고 있는 동안 김대중은 일반 대의원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9월29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지명에 필요한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대역전극은 2차 투표에서 일어났다. 김대중의 후보지명 획득이었다. 김대중은 1971년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선전했으나 지역감정과 금권, 관권을 동원한 박정희에게 94만표 차이로 아깝게 졌다. 그로부터 30년, 세대교체를 부르짖으며 등장했던 40대 기수들은 그들이 교체하려 했던 노장층의 나이를 10여살 이상 넘기고도 80살을 바라보며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김종필, 50대 초반에 정풍의 표적이 되다


사진/ 벽초 홍명희(왼쪽)와 그의 아들 홍기문. 10년 사이에 평교가 되다보니 홍명희와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홍기문과 말을 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