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 김응룡·김재박 덕장 김인식 용장 김성한… 야구 감독은 사람을 다루는 보스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
1941년 브루클린다저스를 월드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리오 듀로셔 감독이 한 유명한 말이다. 양같이 순한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개 같은 성질의 온갖 잡동사니가 다 모여 있는 선수들을 이끌면서 감독이 마냥 좋기만 하다가는 바보가 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어느 조직의 리더가 안 그럴까마는 프로야구 감독처럼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
하루하루를 매일같이 피말리는 승부의 세계에 살면서 ‘사람만 좋으면’ 냉철하고 엄격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선수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야구 감독이란 자리는 화려하면서도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것이다.
겉은 코끼리, 속은 여우
한국이나 일본은 감독이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감독을 매니저(manager)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도 매니저란 명칭이 붙는 스포츠 종목은 야구 외에 몇개 안 된다(참고로 한국에서 매니저는 팀의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주무를 일컫는 반면, 미국에서는 주무를 트래블링(Traveling) 매니저라고 부른다). 야구 감독을 농구나 아이스하키처럼 헤드코치가 아니라 경영자라는 뜻의 매니저라고 부른 것은 ‘사람을 다루는’ 보스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심리학자로, 성직자로, 선임하사로, 아버지가 됐다가 형님으로 변해야 하는 수천 가지 얼굴을 가져야 하는 게 바로 야구 감독이란 자리다. 흔히들 감독을 분류하는 것은 3분법이다. 지혜로운 지장, 덕을 이끄는 덕장, 투지가 넘쳐흐르는 열혈남아의 용장이다. 하지만 이는 기자들이 편의상 나누기 쉽게 해놓은 것이지 훌륭하고 좋은 감독이라면, 그래서 한국시리즈를 우승해본 명장들이라면 비중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게 마련이다. 정작 가장 바람직스럽지 못한 감독은 철학도, 소신도, 색깔도 없이 구단의 고위층이나 바라보며 선수들의 눈치나 살피며 자리보전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모장(謀將)과 범장(汎將)의 부류들이다.
국내 프로야구 감독들을 색깔별로 분류한다면 김응룡 삼성 감독과 김재박 현대 감독을 단연 대표적인 지장으로 꼽을 만하다. 김응룡 감독은 큰 체구 때문에 ‘코끼리’란 별명이 따라다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여우다. 가슴속에 백년 묵은 여우가 살고 있는, 무늬만 코끼리라고나 할까. 일부에선 해태 시절 김응룡 감독의 한국시리즈 V9을 김성한, 선동렬, 이종범 등 좋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진주 서말을 꿰 보배로 만든 것은 분명 김 감독의 용병술, 곧 매니지먼트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시리즈 9번 진출-9번 우승에 이르기까지 김 감독이 장내와 장외에서 보여준 감과 행동은 정치 9단의 3김을 뺨친다. 해태가 9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초반 홈앤드어웨이 4연전에서 1승1무2패로 열세에 놓였던 93년, 현대에 2연승 뒤 2연패로 몰렸던 96년 한국시리즈는 이순의 백전노장 김응룡의 노회함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들이다.
먼저 93년 대구에서 패하고 숙소로 돌아온 김 감독은 곧바로 전체 미팅을 가졌다. 마침 이 자리에는 3루 코치가 빠져 있었다. 김 감독은 당장 그 코치를 호출했고, 선수들 앞에서 육두문자까지 쓰며 모욕에 가까운 망신을 줬다. 경기중 하지도 않은 실수까지 덮어씌우며 거칠게 몰아세웠다. 순식간에 미팅장은 살풍경으로 변했고 이어 지치고 풀어졌던 선수들의 군기가 바짝 조여진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결국 해태는 서울로 올라와 잠실에서 3연승을 거두며 역전 우승을 거뒀다. 미팅 뒤 김 감독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봉변을 당했던 그 코치를 따로 불러 술잔을 권하며 “야, 너 내 성격 모르느냐”며 위무했다고 한다. 다분히 의도적인 포석이었던 셈이다.
눈높이 지도의 성공
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서 정명원에게 노히트노런의 수모를 당하며 원점 승부로 돌아가자 김 감독은 이번엔 특유의 외곽 때리기로 현대쪽으로 흘러가던 흐름을 순식간에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4차전 구심이 당시 현대 연고지였던 인천 출신이란 점을 파고들어 “인천 출신 심판이 남은 잠실경기에서도 구심을 볼 경우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 판정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이고 노골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심판진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한편 쫓기는 선수들의 가슴에 또다시 불퇴전의 불을 지른 것이었다. 결국 해태는 이번에도 2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실전에서도 가슴속에 구미호가 살고 있는 김 감독의 용병술은 빛을 발한다. 승부처라면 주저하지 않고 투수이건 타자이건 필승 카드를 내밀어 번번이 개가를 올린다. 무엇보다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바로 승부처를 동물적으로 맡아내는 승부감각이다.
전 OB 감독인 윤동균 한화 수석코치는 “감독 시절 경기를 해보면 점수차가 크게 벌어져 승부가 결정난 상황에서도 보내기번트나 스퀴즈번트를 대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를 마치고 나면 그때 김 감독이 왜 그렇게 심하게 나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미리 대비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응룡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승부사라고 할 수 있다”고 혀를 내두른다.
현역 시절 ‘그라운드의 여우’로 불리었던 김재박(47) 현대 감독은 ‘리틀 김응룡’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 현역 시절부터 최고의 스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 감독은 젊은 나이에도 96년 창단한 신생 현대를 98년과 지난해 한국시리즈에 두번씩이나 정상에 올려놓았다.
김 감독의 장점 또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동물적인 승부감각이다. 하지만 김 감독이 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은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보기 좋게 깨뜨린 산증인이란 점이다. 스타 출신 감독들이 그동안 실패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내심 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선수들은 현역 시절의 나처럼 하지 못할까?’ 눈높이 지도의 실패인 것이다. 젊은 나이와 슈퍼스타 출신임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김 감독이야말로 안과 겉이 모두 똑같이 진짜 여우인 전형적인 지장이다.
두산 김인식 감독은 지와 함께 덕을 겸비한, 삼국지로 치면 유비에 해당하는 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야구계에서 어려운 후배들을 잘 도와주고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의리파로 알려진 김인식 감독은 그 누구보다 밑에서부터 추앙되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보스형 감독의 대명사다. 95년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던 날 인천의 숙소에서 전 선수들을 모아놓고 가진 미팅에서 당시 주전에 가려 있던 2진 포수 박현영(은퇴)을 지목해 격려를 아끼지 않은 일화는 ‘감독은 왜 매니저인가’의 정의를 내려준 대목이었다.
그늘 속 선수까지 챙기는 마음
“오늘 우리가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박현영, 네가 제일 큰 일등공신이다. 너는 우리 팀만 아니라면 어느 팀에 가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우리 팀의 포수진이 너무 강해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네가 그 때문에 불만을 터뜨렸다면 나도 괴로웠을 테고 팀 분위기도 엉망이 돼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묵묵히 참아줬다. 감독으로서 정말 고맙다.”
그늘 속에 파묻혀 있는 선수들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김 감독의 친화력은 바로 전해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팀이탈 파동을 일으켰던 선수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이 됐고, 그것은 불과 일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OB가 지옥에서 천당으로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에서 주니치드래곤스의 호시노 감독이 열혈남아의 대표적인 용장이라면, 한국에선 해태 김성한 감독이다. 현역 시절 치열한 승부근성으로 찬스마다 한방을 터뜨리는 ‘해결사’로 익히 명성을 떨쳤던 김 감독은 부임 첫해인 올 시즌 감독으로서도 젊은 감독 특유의 패기와 힘으로 ‘호남야구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수들이 잘못했을 때는 욱하는 성질을 못 참을 때도 있지만 돌아서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뒤끝없는 성격이 무명의 해태 선수들에게 녹아들면서 끈질긴 승부욕을 분출시켜 해태를 올 시즌 최대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구자겸/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jkkoo@sportstoday.co.kr

사진/ 삼성을 선두로 견인하고 있는 김응룡 감독. 해태 시절부터 그의 동물적인 승부감각은 유명했다.
한국이나 일본은 감독이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감독을 매니저(manager)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도 매니저란 명칭이 붙는 스포츠 종목은 야구 외에 몇개 안 된다(참고로 한국에서 매니저는 팀의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주무를 일컫는 반면, 미국에서는 주무를 트래블링(Traveling) 매니저라고 부른다). 야구 감독을 농구나 아이스하키처럼 헤드코치가 아니라 경영자라는 뜻의 매니저라고 부른 것은 ‘사람을 다루는’ 보스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심리학자로, 성직자로, 선임하사로, 아버지가 됐다가 형님으로 변해야 하는 수천 가지 얼굴을 가져야 하는 게 바로 야구 감독이란 자리다. 흔히들 감독을 분류하는 것은 3분법이다. 지혜로운 지장, 덕을 이끄는 덕장, 투지가 넘쳐흐르는 열혈남아의 용장이다. 하지만 이는 기자들이 편의상 나누기 쉽게 해놓은 것이지 훌륭하고 좋은 감독이라면, 그래서 한국시리즈를 우승해본 명장들이라면 비중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게 마련이다. 정작 가장 바람직스럽지 못한 감독은 철학도, 소신도, 색깔도 없이 구단의 고위층이나 바라보며 선수들의 눈치나 살피며 자리보전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모장(謀將)과 범장(汎將)의 부류들이다.

사진/ 슈퍼스타 출신임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현대 김재박 감독이야말로 전형적인 지장이다.

사진/ 젊은 감독 특유의 패기로 ‘호남야구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김성한 감독.

사진/ 야구계에서 어려운 후배들을 잘 도와주고 의리파로 알려진 두산 김인식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