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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향수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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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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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되 깊은 향기의 마력, 당신은 어떤 체취를 선택할 것인가

‘그 이상한 일은 처형장과 그 주변 언덕에 구름처럼 모여 있던 1만여명의 사람이 한순간에 갑자기 푸른 옷을 입고 마차에서 막 내려서는 작은 남자는 절대 ‘살인마’일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힌 일이었다!(……) 그렇다. 그건 그 작은 살인마에 대한 사랑이었다.’(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중)

2천억원대 시장, 매년 30%씩 성장

순결한 소녀 25명을 살해한 흉악범의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일순간 바꾼 것은 바로 그가 뿌린 향수였다. 싱그러운 소녀들의 체취를 모아서 만든 향수가 사람들의 분노를 사랑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향기 때문에 살인범도 용서하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 <향수>는 물론 허구의 이야기지만, 많은 후각실험이 입증하듯 좋은 향기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향수, 그 은밀한 마력의 물은 더이상 사치스러운 여성이나 별스러운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몇해 전부터 젊은이들의 선물 리스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면서 이제 일반인들의 서랍 속에도 한두개쯤은 있는 패션용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출근할 때 향수 뿌리는 걸 잊고 나오면 허전해요. 마치 양치질을 빼먹은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직장인 최정근(31)씨는 불과 몇년 전까지 향수쓰는 남자들을 날라리나 제비족으로 생각하는 ‘순박한’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2년 전 아내에게서 향수를 선물받았을 때만 해도 향수를 뿌리는 일이 남우세스럽게 느껴졌지만 이제 향수병이 비워져갈 때쯤이면 직접 향수 매장을 찾는 애호가가 됐다. “향수 한두 방울 뿌리면 일단 기분이 상큼해지지요. 회사에서 여자 동료들이 ‘좋은 냄새 난다’며 칭찬하고 지나가면 물론 더 좋고요.”

보수적인 직장 분위기에도 그의 동료 너댓명 가운데 한명은 최씨처럼 향수를 사용한다고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기남(30)씨 역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의 선물로 향수문화에 ‘개명’했다. “특별히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저에게 향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김씨가 향수를 쓰는 이유다.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향수를 뿌려주기도 하는데 다들 처음에는 질색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 향수 이름이 뭐냐, 얼마 정도나 하냐고 슬그머니 물어온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국내 향수시장 규모는 약 2천억원대. 화장품 전체매출 가운데 향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4% 정도로 18%에 이르는 향수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해마다 30% 정도의 높은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인터넷상의 향수동호회나 공동구매모임도 급증하고 있다. 늘어나는 향수 소비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최씨나 김씨 같은 남성들이 차지한다.

신촌현대백화점의 한 향수매장 직원은 “2년 전부터 남성고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면서 “20대 젊은이들이 매장을 많이 찾지만 구매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30대 이상의 남성들이 더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매장에서 향수를 하나 산 이영수(34)씨는 겨울철에는 애프터세이브만 쓰지만 향이 금방 날아가는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는 향수를 즐겨 사용한다. 영업직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하는 이씨는 향수를 이용하는 것이 ‘고객에 대한 예절’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향수는 격식을 제대로 차림으로써 상대방에게 존중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선물용 소비, 우리 향수문화의 특징

사진/ 국내향수시장은 한해 30% 이상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신총현대백화점 향수 매장.(박승화 기자)
단순히 개인의 소비취향뿐만이 아니라 예절로서 향수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향수가 이제 우리에게도 서서히 문화로 정착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짙은 향수를 뿌린 남자에게는 거부감이 들지만 은은하게 향수를 뿌린 남자를 처음 만나면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대학원생 김현주(28)씨의 말처럼 남녀간의 만남에서도 향수의 이용은 자기과시보다는 섬세한 매너축에 속한다. 김씨가 남자친구에게 향수를 선물한 이유도 ‘배려받기’위해서라고.

강한 체취를 가리기 위해서 향수가 보급된 서양과 달리 선물용으로 향수소비가 늘어난 것은 우리 향수문화의 재미있는 특징이다. 향수=선물용이라는 인식이 생긴 건 해외여행 개방 이후 외국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선물로 향수를 하나둘씩 사들고 오면서부터. 국산향수시장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향수는 ‘값지고 진귀한’ 선물이었다. 외국화장품 수입이 전면 개방된 이후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품위있는’ 만족감을 주는 선물 1순위가 됐다. 향수 본래의 목적 외에 샤넬, 구찌 등 해외 고가 브랜드에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매력도 향수 구매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해마다 밸런타인데이나 성탄절이 끼어 있는 달에 두배 이상 오르는 향수 매출이 말해주듯 향수는 이성간에 특히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다. 향수와 성(性)적 반응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없다는 것이 과학적 연구결과지만 성적인 자극이나 관능을 흔히 모티브로 삼은 향수광고 탓도 있다다. “내가 좋아하는 향이 바로 남자친구의 체취처럼 느껴져서 좋아요. 옆에서 늘 나는 향기가 (그 사람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하고요.” 이보영(25)씨가 남자친구에게 향수를 선물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냄새가 사람들의 행동이나 심리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는 연구결과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로를 잘 아는 애인이나 친구가 아닌 이상 향수는 그다지 좋은 선물 아이템이 아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성의의 표시로 향수를 선물하는 것은 실수에 가깝다. 선물할 향수를 고르는 게 남의 옷이나 신발을 고르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실상 향수는 옷이나 신발보다 더 본인의 취향이 중요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꼴불견 옷차림보다 맘에 들지 않는 냄새를 견디기가 더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향수와의 행복한 첫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다소 한심하거나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스스로 향수매장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향수전문가 송인갑씨는 “옷을 잘 입으려면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안목을 쌓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향수 역시 직접 써보면서 나의 취향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같은 향이라도 사람의 체온이나 기후 등에 따라 다른 향이 나기 때문에 막연히 꽃을 좋아한다고 플로럴향을 고르거나 유행하는 제품이라고 해서 집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톱노트에 현혹되지 말라

사진/ 국산향수의 시장점유율은 아직 낮은 형편이다. 유채꽃향을 추출한 국산향수 <제주> 개발현장.(이정용 기자)
그러나 막상 향수 매장에 가더라도 나의 향이 번쩍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향수들이 저마다 복잡한 향을 띠는데다가 후각은 피로하기 쉬운 감각이기 때문에 대여섯 가지의 향을 계속해서 번갈아 맡다보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전문가들이 초보자들에게 권하는 향은 시트러스향이나 플로럴향 같은 가벼운 향이다. 감귤향이 배어나오는 시트러스향은 상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안면근육의 긴장도를 20% 정도 감소시켜준다는 ‘바다 냄새’가 들어간 오셔닝향이나 남성의 경우 나무와 풀의 신선한 느낌이 나는 우디향도 권할 만하다. 이런 향들은 대체로 청량감이 높기 때문에 요즘 같은 여름철에 사용하기에 더욱 적절한 향이다. 또한 서양 사람보다 체취가 약한 동양인들에게 어울리는 향이기도 하다. 웬만큼 취향개발이 되기 전에 머스크향이나 스파이시향 등 진한 향은 피하는 게 좋다. 사향노루의 뿔향기에 따온 머스크향(사향)이나 시나몬, 클로버, 후추 등 향신료를 연상시키는 스파이시향은 자극적이고 다소 무거운 향이기 때문에 여름철에 선택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사향, 용연향(고래의 창자 분비물에서 추출한 향) 등 동물성 향이 강한 오리엔탈 계열의 향수도 여름철보다는 겨울철에 시도해보는 게 좋다고 한다.

그리고 향이 진한 퍼퓸이나 오 드 퍼퓸보다 가벼운 느낌의 오 드 투왈렛을 선택하는 것이 부담없다. 오드 투왈렛을 쓰기도 좀 어색하다면 더 향이 약한 오 드 콜롱을 보디로션처럼 전신에 바르는 방법도 있다. 목욕비누, 로션 등을 함께 쓰면 약하지만 여러 겹 겹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향을 몸에 지닐 수 있다. 단 이렇게 사용할 때는 같은 향의 제품을 사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시향할 때는 흔히 매장에서 뿌려주는 종이의 냄새를 맡기보다는 직접 몸에 뿌려보는 게 좋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냄새를 맡은 즉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뿌리자마자 나는 향기, 즉 톱노트는 향수에 들어가는 알코올과 뒤섞여서 나는 향으로 3∼4분이 지나면 날아가기 때문에 그 향수의 진짜 향기라고 보기 어렵다. 향수 본연의 향을 제대로 느끼려면 톱노트가 사라진 다음 10∼30분 동안 유지되는 미들노트를 맡아봐야 한다. 좀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다면 미들노트가 사라진 뒤에서 몇 시간 동안 유지되는 잔향, 즉 베이스노트까지 맡아보는 게 좋다. 오리엔탈 계열의 동물성 향이 많이 첨가된 향수들은 깊게 여운이 남는 베이스노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보자들이 세 가지 발향단계를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다. 스파이시향 향수라고 해도 그안에는 플로럴과 시트러스, 사향 등을 내는 수백 가지 원료들이 적절한 비율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똥냄새가 들어 있는 향수들도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떤 향수도 똥냄새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똥냄새를 맡기 위해 향수를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똥냄새는 별로 역겨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체취를 줄이면서 체취와 잘 어울리는 향수가 좋은 향수라는 점에서 향수제작에 분비물이나 배설물 등 체취에 가까운 향을 사용하는 건 당연한 공식이기도 하다.

잘못 쓰는 향수는 공해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향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취다. 같은 향수라도 20대 여성이 뿌렸을 때와 40대 남성이 뿌렸을 때는 같은 냄새라고 느끼기 어렵다. 체취와 어울리지 않는 향수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다. 특히 땀냄새, 발냄새 등 고약한 몸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리는 것은 주위 사람들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10대 소녀들의 체취를 모았다는 이야기는 향수에 대한 일종의 역설이기도 하다. 자신의 체취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않으면서 향수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공해를 일으키는 환경범죄자에 불과할 것이다.

도움말:(주)태평양 기술연구원. (주)엘카 코리아. (주)블루벨 코리아.
참고자료:<냄새, 그 은밀한 유혹>(까치 펴냄), <향, 향수이야기>(한송 펴냄), <향수, 영혼의 예술>(디자인하우스 펴냄).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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