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
임상수가 <하녀> 리메이크에서 보여주려던 감정은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것은 경멸과 조롱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하녀 은이의 고용주들은 오로지 경멸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표면상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건 하녀 은이지만, 그건 상관없다. 영화가 그리는 그 과정 자체가 관객의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조롱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현실에서 격리된 계급 구조의 산물로, 그를 떠나서는 생각, 아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 좁디좁은 영역에서 제한된 경험만 하고 살아오다 보니 온전한 인간이 가져야 할 감정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치졸하고 유치하며 놀라울 정도로 상상력과 감정이입의 능력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 정서적으로 그들은 모두 장애인이다. 하녀 은이, 그 정도는 책임져야지 않겠나 영화가 호사스럽게 표현하는 그들의 세계 역시 내재적인 기형성을 담고 있다. 얼핏 그들은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의 화집을 감상하고 베토벤을 연주하며 분명 몇억원은 넘어갈 홈시어터로 조르다노의 오페라를 듣는다. 이 모든 것은 부러워해 마땅할 것들이나, 정작 그들은 그 환경에서 문화적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이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방으로만 존재한다. 영화 촬영 도중 피아노 치는 흉내만 내고 사운드 없는 세트에서 음악 듣는 척만 하고 있었을 배우들을 생각하면 이 모방은 더욱더 공허하게 보인다. 그 결과 베토벤과 조르다노를 감상하고 로버트 인디애나의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는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기껏해야 아침 일일연속극이나 궁중사극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이것은 캐리커처이고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억지 풍자인가? 정상적인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런 인간적 공허함이 특정 계급에서 예상외로 보편적이며, 이들이 세상을 주도할 때 이런 감정이입 불능의 기형성이 우리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직접 보아왔다. 그들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에게 가하는 폐해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임상수의 괴물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존재이다. 그들은, 적어도 여자들은 자신의 호사스러운 집 안에 머물러 궁중사극 놀이를 하느라 집 밖의 사람들은 건드리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들의 먹이가 되어, 원작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반항을 하고 사라지는 은이는 딱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시중을 들어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들어온 잘못의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지 않겠는가. 듀나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