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슈메르씨
만화 <슈메르 성인>
등록 : 2010-05-12 13:48 수정 : 2010-05-13 19:58
추억의 외계인 드라마 <브이>(V)가 산뜻한 모습으로 재방문하고 있다. 기대와는 달리 옛날만큼의 짜릿함은 없다. 그동안 외계인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렇게 초우주적인 기술력으로 지구인을 잡아먹으려는 외계인의 이야기는 식상하다. 내게는 <맨인블랙> <개구리 중사 케로로> <니아 언더 세븐>처럼 지구인과 어울려 사는 덜떨어진 외계인이 주는 알콩달콩한 재미가 좋다. 거기에 새로운 리스트를 추가해보자. 쓰나미노 유의 만화 <슈메르 성인>.
‘슈메르 성인’은 아마도 지금까지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 중에서 가장 기술력이 떨어지는 족속이 아닐까? 현재의 지구보다 20년 정도 뒤처진 기술력으로 용케 우주여행에 나섰는데, 실수를 거듭해 지구로 날아오고 말았다. 이런 꼴이니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던 지구인도 곧 시큰둥해졌다. 그러나 고향 별로 돌아갈 재주도 없는 터라, 그들 중 대표 1명을 ‘이문명 친선대사’의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2년 동안 문제없이 버티면 슈메르 성인이 지구에 정착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시작된 대표 슈메르 성인의 지구 생활. 첫 정착지가 하필이면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일본이란 게 또 난코스다. 인감이 없으니 전입신고가 쉽지 않은 정도야 그렇다 쳐도, 이름을 말하라니 지구인은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혀를 말아 걸쭉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를 내뱉는다. 귀찮은 공무원이 말한다. “그럼 그냥 슈메르씨로 하죠.” 알고 보니 그 완고한 원칙도 제멋대로 뒤집어버리는 게 지구인이었다.
이렇게 일본에 들어선 슈메르씨는 외모만 좀 특이할 뿐, 순박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한 시골 사람 같다. 그런데 그게 문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버튼을 안 누른다고 청년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무시했다고 초등학생들에게 혼이 난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운전자에게 치일 뻔하는데, 항의를 하려고 그 차를 따라가던 중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의 바람을 빼버린다. 그에게 지구는 원칙과 법규를 지켰다간 생존 자체가 어렵고, 사소한 선의를 베풀었다 낭패를 당하는 이상한 별이다. 나는 슈메르씨가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당할 때마다 배꼽을 잡지만, 그 통렬한 문명 비판에 가슴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래, 스트레스는 술로 풀어야지. 슈메르씨에게도 ‘음주면허증’이 발급된다. 슈메르 성인은 연령이 불분명해서 성년과 미성년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알코올 분해 능력에 따라 1종, 2종의 면허가 발급되는 것. 그리하여 주인공은 이문화 체험을 할 겸 ‘선술집’이라는 곳을 방문하는데, 곧 술꾼들의 포로가 되어 낙서투성이가 된 얼굴로 인증 사진을 찍히는 신세가 된다. 도와주고 싶지만 만화 밖의 나는 힘이 없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굳세어라, 슈메르씨”라는 대사를 소리 내어 따라하며 위로하는 수밖에.
이명석 저술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