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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메이드 인 프랑스’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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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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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넘버5. 구찌 러쉬, 폴로 스포츠. 흔히 쓰는 향수 중에 국내 브랜드를 달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국내 화장품회사에서는 아예 향수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에서 화장품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주)태평양이 처음 향수를 내놓은 건 1963년 시판한 ‘오스카 향수’. 200년이 넘는 유럽의 향수 생산역사에 비하면 아직 맹아수준이지만 국내 향수 생산의 역사도 40년에 이른다.

지난해 국내 향수시장의 매출규모는 약 1600억원 규모. 여전히 방대한 밀수입규모와 대부분의 해외여행객들이 한두개씩 들고온 향수의 수치를 감안하면 시장은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측된다. 이 가운데 수입과 국산의 비율은 6:4 정도(금액 기준). 의외의 결과다. 향수 매장에서 눈씻고 뒤져도 국내 브랜드 향수를 찾아보기 힘든 데 말이다. 이 수치는 향수라기보다는 목욕용품으로 분류되는 샤워콜롱(샤워 뒤 바르는 보디로션)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샤워용품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향수 계열에는 드는 퍼퓸이나, 오 드 퍼퓸, 오 드 투왈렛, 오드 콜롱만 놓고 비교한다면 국내제품의 비율은 급격히 하강곡선을 긋는다. 국내 기업들은 고부가가치보다 박리다매로 돈을 벌고 있는 형편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향수가 기술집약적인 산업이라는 데 있다. 향수선진국인 프랑스는 5대에 걸쳐 향수를 생산하고 있는 겔랑가(家)를 비롯해 200년 이상 노하우를 축적한 향수개발사들이 여럿 있다. 이들 향수회사의 향수제조법은 그야말로 ‘며느리도 모를’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에 부쳐져 내려왔다. 전통적인 향수 개발사들이 주로 가업으로 이어져 온 것도 이런 이유다.

향수가 실용성보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감성상품’이라는 점 역시 국내 기업들이 해외 브랜드의 벽을 뚫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다. 즉 브랜드 이미지가 상품 가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향수시장에서 한국의 브랜드가 ‘메이드 인 프랑스’의 진입장벽을 뚫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난해 태평양이 자회사를 만들어 태평양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우지 않고 외국인 모델을 기용해 홍보한 ‘에스쁘아’의 성공은 브랜드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례였다. 이 제품은 국내에서 기획하기는 했지만 향 제조, 용기 디자인, 제조 등을 모두 프랑스에서 생산한 사실상 ‘메이드 인 프랑스’제품이었기 때문에 국산 향수의 성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국산 향수의 갈 길이 아직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태평양에서 99년 출시한 ‘질’은 향료를 제외한 개발과 제조, 용기 디자인까지 국내 기술로 만들어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97년부터 한국인의 취향에 관한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머스크향의 이 향수는 대중적인 홍보 대신 방문판매를 통해 고급제품의 이미지를 구축해나갔다. 지난해에는 120억원어치가 팔려나가 단일 제품으로는 국내외제품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향수가 됐다. 올해 5월 출시한 ‘일리’ 역시 97년 개발을 시작해 4년 동안 공들여 만든 제품. ‘일리’는 좀더 젊은 층의 여성을 위한 플로럴 향수로 본격적인 국내시장 진입을 겨냥하고 내놓은 상품이다. 태평양의 성공에 자극받은 LG생활건강, 코리아나 등의 선발 업체들 역시 고급향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향수의 원료가 되는 향료를 개발하는 조향산업은 여전히 거북이 걸음이다. 향료를 모두 유럽 등에서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100% 국산제품을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운 실정이다. 유럽보다 훨씬 늦게 출발했지만 연계 개발을 통해 향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조향회사까지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본 화장품회사들의 지혜를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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