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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 제일 잘 얻어터지는 슈퍼 히어로

<킥 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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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05 15:52 수정 : 2010-05-0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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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 애스〉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헐크, 아이언맨…. 21세기 할리우드는 슈퍼 영웅들의 파티다. 터무니없는 초능력 영웅들이 화려한 그래픽 효과를 등에 업고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게 다 사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중 하나만 날아왔어도 젊은이 수십 명을 싣고 침몰하던 배도 건져냈을 거고, 그랬다면 5주 연속 결방으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꽃다운 개그맨들도 구했을 텐데.

이런 즈음에 이상한 슈퍼 히어로 영화 한 편이 날아왔다. 이름도 거시기하다. <킥 애스: 영웅의 탄생>. 특별한 재주라고는 여학생 앞에서는 ‘존재감 제로’가 되는 능력밖에 없는 고등학생이 어느 날 초능력 영웅이 되기로 했다. 촌스러운 초록색 코스튬을 입고 해결사가 필요한 사람은 이메일을 보내라고 인터넷 홍보에 나섰다. 참으로 어쭙잖은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사고로 인해 두드려맞아도 아프지 않은 몸이 되면서, 그 괴상한 능력으로 집단 구타당하는 시민을 구한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유튜브 스타가 된다.

“왜 아무도 슈퍼 히어로가 되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킥 애스의 모험담은 제법 철학적이다. <왓치맨>까지는 아니더라도 슈퍼 영웅들의 사생활을 삐딱한 현실감으로 들여다보는 재주가 만만찮다. 그러나 이런 진지함은 제쳐두자. 내게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제법 시큼털털한 웃음을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궁상맞은 슈퍼 히어로 지망생이 우연을 거듭해 진짜 슈퍼 히어로로 둔갑해가는데, 그게 참 덕후스럽다. ‘유튜브 시대의 슈퍼 히어로’라는 별명이 딱 들어맞게, 그의 출세 가도엔 마이스페이스, 유튜브, IP 추적 같은 당대의 인터넷 문화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아빠와 딸 사이인 빅대디와 힛걸은 제법 슈퍼 히어로의 역량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생활도 현대문화에 찌들어 있다.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인터넷 쇼핑을 하며 딱 맞는 새 장비가 있는데 30만달러나 든다고 고민하는 딸과 걱정스럽게 모니터 앞으로 와서는 “와우!” 하더니 장바구니에 넣으라고 재촉하는 아빠.

피 범벅 작렬의 블랙유머도 제법이다. 나는 ‘킥 애스’를 ‘캑 애스’로 잘못 발음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 어감이 두드려맞는 데 일가견 있는 이 주인공에게 잘 어울린다. 배트맨·스파이더맨도 제법 맞지만 이 정도는 아니거든. 딸에게 방탄조끼 입히고 가슴에 총알을 쏴대는 빅대디, 마피아보다 더 잔혹한 행동을 도맡아하는 미취학 소녀 힛걸. 터무니없는 살상 장면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영화로는 <킬 빌> 이래로 이만한 걸 보지 못한 것 같다.

도덕적으로 보자면 불편한 게 없지 않은 영화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이 뒤집어져 있는데 어쩌겠나? 킥 애스가 폭력배와 맞선 채 얻어터지고 있는데,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신고도 안 하고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인간들. 그게 리얼리티다. 영웅도 악당도 전혀 멋지거나 쿨하지 않은 영화라니. 어처구니없으면서 통쾌하잖아. 이 영화는 세상을 놀리려고 나왔다. 나는 놀림당하면서도 웃는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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