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프랑코 장군이 보고 있는 가운데 파시스트 정권에 충성을 서약하는 사마란치(왼쪽). 극우 인사들과 나치식 경례를 하는 사마란치(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다섯 번째). 한겨레 자료사진
사마란치의 배경은 의심할 여지 없는 국가주의파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공화파 정부군의 징집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다. 뼛속부터 귀족이던 그는 결코 공화파에 섞일 수 없었다. 결국에는 탈영해 프랑스로 몸을 숨겼고, 적절한 때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팔랑헤당(Falange)에 가입했다. 팔랑헤당은 급진우익 정당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이후에는 군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옆에 바싹 붙었다. 프랑코는 1936년 공화파 정부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로,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뒤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73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실제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원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영국의 조사전문기자로 조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사마란치의 비리를 추적해온 앤드루 제닝스는 “사마란치는 프랑코의 발밑에 넙죽 엎드리기를 꺼린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사마란치는 극우독재자의 강력한 비호 속에 직물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고, 금융권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승승장구한 그는 1967년 프랑코 정부의 스포츠 장관으로 임명돼 영향력을 넓혔고, 1973년부터 77년까지는 바르셀로나주의 지사를 지내며 국내 정치 활동의 절정을 맞았다. 사마란치의 파시스트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는 대부분 이 시절에 수집됐다. 그는 1974년까지 파시스트 동맹이 펼치는 행사에서 꾸준히 나치식 인사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의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사마란치는 공식적 자리에서는 더 이상 파시즘을 숭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0년 사마란치는 IOC 위원장에 선출됐다. 그가 IOC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도 역시 정치적 배경이 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IOC의 고위층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극우파가 자리잡았고, 그들은 스페인에서 온 동지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다. 아디다스 창립자 아들과 손잡아 이때 사마란치와 손잡은 사람은 아디다스의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였다. 다슬러는 사마란치를 열정적으로 지원했고, 사마란치는 그에게 올림픽 훈장과 스폰서 마케팅 계약권을 선물했다. 한편 이 시기의 다슬러는 월드컵 축구마저도 아디다스 왕국에 편입시키고 싶어했는데, 그의 욕심과 기대에 100% 부응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훗날 사마란치와 함께 세계 양대 스포츠 기구 장기 집권의 역사를 쓴 조제프 블라터 현 FIFA 회장이었다. 이후 사마란치는 21년간 세계 스포츠계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고, 집무에서는 프랑코 총통의 강압적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각하’라고 불리길 좋아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IOC에서는 사마란치의 파시스트 경력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됐다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분위기가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육신이 사라졌다고 시간과 기억마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에 이바지한 이에게 준다는 서울평화상의 제1회 수상자가 사마란치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