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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파시스트 사마란치를 추억함


독재자 프랑코 밑에서 나치식 경례 하며 승승장구…
독일·이탈리아 극우파의 도움으로 IOC 위원장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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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05 15:19 수정 : 2010-05-0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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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프랑코 장군이 보고 있는 가운데 파시스트 정권에 충성을 서약하는 사마란치(왼쪽). 극우 인사들과 나치식 경례를 하는 사마란치(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다섯 번째).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4월12일 세상을 떠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좋은 추억만을 남기고 떠났다. 결정적인 끈은 단연 서울올림픽이었다. 사마란치는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24회 여름올림픽 개최지 발표에서 “쎄울, 꼬레아”를 외쳤고, 이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중심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는 또한 김운용 전 IOC 위원과 손잡고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에 들어갈 수 있게 지원하며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프랑코 발밑에 넙죽 엎드린 사람”

세계 스포츠계에서는 사마란치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가 올림픽을 진정한 국제적인 이벤트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올림픽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무너뜨리고 철저한 상업주의를 도입해 ‘돈잔치’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9년에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IOC 위원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에 휘말리며, 자신 역시 그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자크 로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솔트레이크 스캔들보다 더 금기시돼온 과거가 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사마란치의 작은 체구와 수줍은 웃음이 가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고급 교육을 받고 스포츠를 즐기며 자랐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아무런 걱정이 없던 나날에 시련이 찾아왔다. 시한폭탄과도 같던 스페인 사회의 대립각이 맞서며 내전이 일어났던 것. 종교인, 군부, 지주, 고급 상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주의자와 노동자·중산층이 주축이 된 공화파가 싸움을 벌였다.


사마란치의 배경은 의심할 여지 없는 국가주의파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공화파 정부군의 징집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다. 뼛속부터 귀족이던 그는 결코 공화파에 섞일 수 없었다. 결국에는 탈영해 프랑스로 몸을 숨겼고, 적절한 때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팔랑헤당(Falange)에 가입했다. 팔랑헤당은 급진우익 정당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이후에는 군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옆에 바싹 붙었다. 프랑코는 1936년 공화파 정부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로,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뒤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73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실제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원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영국의 조사전문기자로 조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사마란치의 비리를 추적해온 앤드루 제닝스는 “사마란치는 프랑코의 발밑에 넙죽 엎드리기를 꺼린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사마란치는 극우독재자의 강력한 비호 속에 직물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고, 금융권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승승장구한 그는 1967년 프랑코 정부의 스포츠 장관으로 임명돼 영향력을 넓혔고, 1973년부터 77년까지는 바르셀로나주의 지사를 지내며 국내 정치 활동의 절정을 맞았다.

사마란치의 파시스트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는 대부분 이 시절에 수집됐다. 그는 1974년까지 파시스트 동맹이 펼치는 행사에서 꾸준히 나치식 인사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의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사마란치는 공식적 자리에서는 더 이상 파시즘을 숭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0년 사마란치는 IOC 위원장에 선출됐다. 그가 IOC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도 역시 정치적 배경이 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IOC의 고위층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극우파가 자리잡았고, 그들은 스페인에서 온 동지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다.

아디다스 창립자 아들과 손잡아

이때 사마란치와 손잡은 사람은 아디다스의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였다. 다슬러는 사마란치를 열정적으로 지원했고, 사마란치는 그에게 올림픽 훈장과 스폰서 마케팅 계약권을 선물했다. 한편 이 시기의 다슬러는 월드컵 축구마저도 아디다스 왕국에 편입시키고 싶어했는데, 그의 욕심과 기대에 100% 부응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훗날 사마란치와 함께 세계 양대 스포츠 기구 장기 집권의 역사를 쓴 조제프 블라터 현 FIFA 회장이었다.

이후 사마란치는 21년간 세계 스포츠계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고, 집무에서는 프랑코 총통의 강압적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각하’라고 불리길 좋아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IOC에서는 사마란치의 파시스트 경력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됐다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분위기가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육신이 사라졌다고 시간과 기억마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 평화와 인류 화합에 이바지한 이에게 준다는 서울평화상의 제1회 수상자가 사마란치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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