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이 완두콩에서 발견한 것은 자연법칙이었고, 황우석 교수의 핵치환 실험은 예측한 바를 현실에 적용하는 공학의 영역이었다. 이미지 투데이·한겨레 자료사진
멘델이 재발견된 데에서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다. 멘델이 재발견된 이유는 그가 출판한 논문의 결과가 수십 년 뒤 다른 학자들에 의해 ‘재현’됐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전법칙을 발견한 학자들은 선취권을 합의하기 위해 멘델을 이용했다. 이 말은 그들이 발견한 현상과 멘델이 발견한 현상이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멘델이 무슨 생각으로 실험을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형질을 나타내는 단위가 존재하고, 이들이 거의 정확한 정수비로 분리된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멘델의 실험 결과는 지나칠 정도로 정확했지만, 이는 이론이 예측하는 결과에 합치했다. 지금 다시 노란 완두콩과 초록색 완두콩을 교배해도 멘델의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과학은 ‘재현 가능’한 측정량에 몸을 기대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실험도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난자의 핵을 다른 세포의 핵으로 치환하면 유전체가 뒤바뀐 줄기세포를 ‘이론적으로’는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핵치환을 통해 맞춤형 줄기세포를 만드는 일은 자연에 숨겨진 법칙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자연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공률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황 교수팀의 조작된 논문에도 이처럼 낮은 성공률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성공적인 핵치환을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난자가 필요하다. 선진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했다. 엄청난 윤리적 비판이 쏟아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황 교수의 논문은 자연에 존재하는 현상을 찾고 이해하려는 과학의 성과물이 아니다. 과학이 예측하는 바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공학 영역인 것이다. 그리고 젓가락질에 대한 강조에서 볼 수 있듯이 그건 거의 기예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실험 결과가 재현되든 안 되든 언제든 실험 조건이 달랐다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 이런 건 과학이 아니다. 이런 기예는 이론을 건설하기 위한 모재료가 되지 않는다. 어제는 되고 오늘은 되지 않는 그런 불분명한 결과는 과학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내가 하면 되고 남이 하면 안 되는, 그래서 언제든지 상대방의 젓가락질을 탓할 수 있는 결과물은 과학이 아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그런 현상을 과학자는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겐 내가 해도 로맨스요 남이 해도 로맨스인 사실만이 인정된다. 그래야 자연은 언제고 자신의 신비를 수줍게 드러낸다. ‘재현 가능’과 재연에 대한 불안감 연구의 정직성을 이야기하는 윤리학자들은 단 한 번도 현장에서 실험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과학자가 모든 실험 결과를 공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도 인간이기에 가설에 합당한 결과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문제는 과학자를 견제하는 무형의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실험이 동료에 의해 다시 재연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학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이렇게 재현되는 결과만이 선택되고 진화한다. 동료를 속이려던, 권위로 동료를 찍어 누르려던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과학자도 인간이다. 그들도 서로를 속이고 자신을 속인다. 그럼에도 과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마치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재현 가능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멘델의 실험 결과가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것은 심각한 논란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피셔가 지적한 멘델의 비율이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잡종과 순종의 비율은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2 대 1’의 비율로 나타난다. 멘델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쯤 측정을 멈췄을 것이다. 멘델의 실험을 재현하려던 많은 식물학자도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과학자의 작업이 윤리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순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설에 부합하는 결과는 단 한 사람의 과학자에 의해서만 테스트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성과 일반성에 대한 추구는 과학자의 덕목이다. 그 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자의 실험 결과에 약간의 조작이 가해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 조작은 재현되거나 재현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을 지닐 뿐이다. 멘델은 가설이 예측하는 결과를 미리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확히 2 대 1의 비율이 나오지 않은 실험 결과는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완벽주의자였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논문 외에 멘델이 남긴 노트와 메모를 보면 그가 정말 철저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숫자를 기록하는 데 누구보다도 철저했다. 물론 그에게 완벽주의자의 면모가 있었다고 해서 실험 결과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멘델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멘델은 가설을 세우고 측정을 진행하는 전형적인 과학자의 일상 속에서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완벽하지 못한 것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실험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은 자연의 복잡함 속에 맡겨둔 채 멘델은 굳건히 자신의 가설을 믿었다. 하지만 황우석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강 연구원의 논문 조작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멘델처럼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일 뿐이다. 논문 조작 사실을 알고도 계속해서 정당함을 주장한 일 또한 윤리적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했다. 조밥나물 잡종, 멘델이 인정한 실패 그에게 재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재현의 기회를 주면 그는 성공할 것이다. 난자의 핵을 치환하는 일은 이미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것이 가능하느냐는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들이 말한 것처럼 효율적인 핵치환 기술이 마련됐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황 교수는 실패했다. 황 교수는 멘델처럼 자연법칙을 찾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과학적으로 이미 알려진 현상을 기술적으로 향상시키고 싶어한 공학자였을 뿐이다. 따라서 재현 가능성이라는 과학의 문제에서 그는 비껴서 있었다.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가 값싼 재료를 사용해 부실한 다리를 건설했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건 다리를 다시 건설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멘델의 연구는 재현 가능성에 열려 있지만 황우석 교수의 것은 그렇지 않다. 둘은 다르다. 멘델은 ‘언제나 재현되는’ 자연법칙을 찾고 있었지만, 황 교수는 지식을 응용하고 있었다. 멘델의 논문은 조작의 의심에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지만, 황 교수의 것은 그렇지 않다. 나아가 멘델은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서도 황 교수와 달랐다. 멘델의 두 번째 논문 ‘인공선택에 의한 조밥나물 종의 잡종에 관하여’는 실패작이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완두콩에서 얻어진 결과가 거의 재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렬하게 인정했다. 잡종을 형성하고 다시 분리시키는 입자 유전의 원리는 완두콩에서 조밥나물로 넘어가는 순간 깨져버렸다. 멘델은 “제시된 실험에 따라 조밥나물에서는 완전히 상반된 현상이 보인다”고 인정했다. 멘델은 그런 사람이었다. 멘델이 황우석 교수처럼 과학적 태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두 번째 논문을 완벽하게 조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고, 좌절된 꿈을 안은 채 연구를 포기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완두콩에서의 야심찬 성공이 조밥나물에서 재현되지 않았을 때 이 과학자가 보여준 태도, 그 외의 무엇이 필요한가. 멘델은 과학자로서 미숙했을지도 모르고, 몇몇 결과는 그에 의해서든 조수에 의해서든 조작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조밥나물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과학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장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의 두 번째 논문과 이후의 행보는 왜 우리가 멘델이라는 과학자를 절대로 황 교수와 비교할 수 없는지를 말해주는 결정적 차이다. 여전히 황우석 교수를 과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공학과 과학, 기술과 과학이 혼재된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통칭해버리는 이 저급한 문화 속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혼합된 그 속에서도 여전히 과학자와 공학자의 목표는 다르다. 둘은 문화적으로 다르다. 둘 중 무엇이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둘은 다르다. 황 교수를 과학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과학을 공학의 우위에 두려는, 과학과 공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황 교수 지지자와 언론의 무지함에 근거할 뿐이다.
황우석 교수는 ‘재현 가능성’이라는 과학의 문제에서 비껴서 있었다. 2006년 1월12일 황 교수가 서울대 연구생들과 함께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