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완간본은 출판사 창비가 기존 〈만인보〉 2~3권씩을 한 권에 엮어 새로 펴낸 것이다. 고은 시인이 올 초 3개월여에 걸쳐 전 권을 다시 살피고 퇴고했다.
 =25년 동안 (<만인보>만을 위한) 고도의 시적 긴장을 유지한 건 아니어서…, 일탈도 있었고 다른 작업도 했고 내 키(173cm)만큼의 작품이 쌓였죠. 그런데 마치고 나니 내 목에 걸린지도 몰랐던 사슬, 아 그동안 내가 묶여 있었구나 느낌이 들어요. 이제 그걸 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뭇가지로, 훨훨, 앉아 있겠다 생각하지요.
 
  1980년, 시인의 나이 마흔일곱에 <만인보>의 얼개를 구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경기 성남 육군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 수감됐다. 이튿날 5월18일 학살이 터졌다.
 
 -이번 신간 27~30권에선 시선의 상당 부분이 광주를 향합니다. ‘광주’에서 기획되고 갈무리되는 셈입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 쓰던 방에 있었어요. <금강경>을 읽다 새벽 4시 아침 커피 한잔하고 서대문으로 옮겨져 사형을 당하고서 비어 있던. 창도 없었고 40촉짜리 전등도 자주 꺼져요. 관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어. 외할머니, 할아버지처럼 과거의 얼굴 하나하나가 현재화됐지요. 그들에게 가기도 하고, 그들이 오기도 하고. 살게 된다면 꼭 한번 모두를 시로 그려야겠다 했습니다. 
 
 시인은 “이런 구상만이 새까만 독방에서 존재를 유지해주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만인보>는 그 절박으로 민초들을 하나하나 호명한 셈이다. 불사춘의 절망과 그를 버티는 넉살이 여백을 채웠다. 
 
 “평양 기생 아미녀가 이름과 몸 떨쳤지요/ 사나이들 뼈깨나 녹았지요/ …/ 수원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 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기생독립단’, 2권)
 
 머슴 대길이, 봉태 등 일제강점기 고향지기를 만나고 1950년대 동족상잔의 대지를 달그림자처럼 지난다. 시인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는 1970년대 ‘동지’들도 부른다. 생명·시공·귀천의 유한성을 거부한다. 원효·히틀러·청량리 588이 호명되고, 박정희·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현직 대통령도 ‘시제’가 되고 만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름을 비로소 불러준 것인데요.
 =평등 개념 따위를 생각한 건 아니에요. 저 높이 새의 눈으로 지상을 볼 때 을지문덕과 장삼이사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내가 주목한 건 이 목숨과 이 목숨의 무차별성입니다. 
 
 새로 낸 책들 맨앞에는 권두언이 새겨져 있다. “만인만이 만인이 아닙니다. 만물도 만인입니다.”(1권) 시인의 말도 있다. “선악과 미추의 차별은 지배논리를 털어낼 때에만 정당하다.”(16권) 
 책을 관통하는 두 명제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올해 분주히 회고하려는 일제강점 100년, 6·25 60주년, 4·19 50주년, 전태일 분신 40주년, 5·18 30주년,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까지도 일찌감치 <만인보>에 ‘시비’로 새긴 격이다. 
 고은 시인은 “참담한 고뇌를 겪고 끙끙대며 시 한 구절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가자무(自歌自舞)로 시를 쓴다”고 말한다. “저절로 노래하고 저절로 춤춘다”(〈산해경〉)는 뜻으로 자신이 곧 시라는 듯 전해졌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 그대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누가 몰라주는 진실 때문에”(‘노무현’ 일부, 13권)
 “부디 그의 신화가 더 이어질수록/ 개발이 악이 아니라 선이기를/ 개발이 정치가 아니기를”(‘이명박’ 일부, 15권)
 
 -실명을 담았으니 비판과 항의, 또는 감사 인사도 있었겠습니다.
 =감사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비판 같은 건 다 받아들여야지. 
 
 시인은 ‘피드백’과 관련한 뒷얘기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고충이 상당했느냐”는 질문에 거듭 “받아들여야지”라고만 말했다. 현 정권에 대해 물었다. “지금은 정치적 묵상 기간”이라며 그는 또 주저했다. “발바닥이 거기 가 있을 때 입이 열린다고 생각하는데 난 지금 집에 있다”며 “발언 하나로 책임을 다한다는 듯한 자세로 있기 싫다”고 말했다.
 거듭 작가회의에 대한 준법서약서 요구 등 근래 현안에 대한 ‘문단 어른’의 생각을 물었다. 시인은 헛웃음을 던졌다. “아이들 장난하는 것 같아서 뭘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어리석고, 잔꾀 내는 어린애들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냥 한번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거기다 대고 뭐라 말하기가 참…. 개미들이 발등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요. 허허.”
 그가 처음부터 사회참여적 작가였던 건 아니다. 알다시피 1951년 출가했다. 행각승으로 방랑하다 1958년부터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2년 환속한다. “늘 죽음만 생각하”던 때였다. 1970년 정릉 계곡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4·19는 시인께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난 4월 혁명 당시 직무유기자입니다. 정치현실에 관여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요. 그러다 나중에 4·19가 얼마나 거대한 가치를 갖는지 알게 된 거예요. 태풍처럼 왔지요. 그러곤 4·19 묘지에서 살았어요. 묘지에서 아이스케키 서른 개, 마흔 개를 먹어도 열불이 안 가라앉을 정도였으니까요. 난 사실 1960년대까지 예술지상주의였어요. ‘허무주의의 맹장’이란 공격도 받았는데 어느날 내가 전혀 감당 못하게 돌아선 거지요. 
 -직접적 계기가 뭡니까.
 =전태일이었죠. 늘 죽음을 달고 다녀야 하루하루가 유지됐던 땐데, 어느 날 서울 무교동 낙짓집에서 술을 마시고 통금에 걸려 탁자 위에 뻗어 자는데 떨어진 거야. 그러다 바닥에 놓인 신문에서 전태일을 봤죠. 노동자 같은 걸 생각도 안 해보다 ‘죽음’이 날 먼저 찌른 건데, 비로소 노동자의 현실, 사회까지 신기루처럼 온 거죠. 그의 막강한 힘에 의해 여러 지식인이 눈을 떴어요. 
 너무 오래된 ‘전설’인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 못하고 과거에 무관심한 세대는 무장 는다. 특히 젊은이에겐, ‘고은’조차 노벨문학상 후보로 회자될 뿐 시인 또는 <만인보> 같은 작품으로 잘 거명되지 않는 눈치다. 
 <만인보>가 독자와 어떻게 만났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시인은 되레 딴청이다. “그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녜요. 골짜기 바람이 책장을 넘기든 말든, 난 그저 유령일 뿐이죠.” 
 
 -시를 읽지 않는 시대가 서운하지는 않은지요.
 =아냐, 그간 너무 오랫동안 시를 많이 읽었어요. 문학을 주름잡아왔어. 지금쯤 한번 죽어줬으면 좋겠어. 묻혀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사람들이 또 갈망할 때가 옵니다. 그때 백골이 나와 사랑을 노래하고 서정을 노래했으면 좋겠어. 지금 보면, 시적 언어도 전부 상품의 도구로 쓰이고, 그렇게 다 빨리고 정작 시는 해골 된 거잖아요. 이렇게 더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통찰인지, 가탈인지 온전히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흔한’ 노벨문학상 얘길 꺼낸다. 수상자 발표 때마다 기자들이 세간의 관심을 짊어지고 안성으로 달려간다. 시인은 “(부담이 되어) 견디기 어려운 질문이니 없던 걸로 하자”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면 문학이, 시가 무엇인지 말씀하시게 될 텐데 미리 좀 엿들을 수 없을까요. 
 =(머뭇거리다) 글쎄, 이제 좀 고민해봐야지요. 명사들의 정의를 따르고 싶진 않고, 문학이 정의되기 이전의 문학부터 살펴야겠지요. 그보다도 활자 가득한 종이가 아닌, 백지가 많이 있어야 돼요. 작가는, 시는 백지가 많아야죠.
 
 시인은 잠시 초점을 흐린 채 “백지야말로 최고의 유혹이야, 미쳐요”라며 웃었다. 그리고 함께 서재를 둘러보았다. 묵향이 봄꽃보다 진했다. 30년 ‘나그네’로 표류하다 잠시 숨 고르는 곳이다. <만인보>에 등장한 5600여 명의 나그네도 그렇게 이 계절을 맞겠다.
 
 “게다가 떠도는 나그네 들어오니 꽃 피듯 반갑네/… /그 나그네 고단한 김에도 잠도 없이/ 신새벽까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신명나다가/… / 문 열고 나가 참았던 소피 으스스 시원하기도 하네/ 한술 더 떠서 어찌 그리 하늘 가득히 별의 가쁨 아우성치나”(‘나그네’ 일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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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담 내가 만난 술꾼, 고은
 
 고은 시인은 ‘술꾼’이다. 시인은 기자에게 소주를 “어머니의 두 번째 젖”이라고 말한다. “내 청춘의 무덤”이라고도 했다. 1987년 그가 소주 광고 모델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라운데, 그래서 놀랍지 않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의뢰로 오에 겐자부로 등 지식인이 돌아가며 소주 광고를 하던 차다. 민주화운동으로 여권도 받지 못하던 때, 일본 지식인의 집단 요청으로 겨우 임시 여권을 받았다. 시인은 말했다. “광고 시안도 직접 썼거든요. ‘깨닫기 위해 오지 않았다. 취하기 위해 왔다. 이 세상에.’ 그랬더니 광고료로 술을 오지게 줘서. 하하하.” 기자는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출간 소회를 묻고 현 정세도 물어야 하는데, 이 ‘분위기’에 아득했다. 시인이 다잡았다. “우리 기업 쪽 여러 광고 의뢰도 있었지만 전부 사절했어요. 소주는 풍류로 했지만, 시라는 기본 품위를 함부로 시장에 꺼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거든.”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3대째 내려오는 한 우족탕집으로 함께 가 소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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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