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는 조지 로메로의 〈분노의 대혈투〉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미친 사람들보다 더 강한 폭력성을 지닌 국가다.
헐리우드 재난영화가 달라졌다 기술자의 논리는 첫 시퀀스 보안관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던 모두의 논리와 같다. 위험인자의 조속한 제거이자,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다. 보안관은 첫 시퀀스에선 ‘대’를 대의했지만, 이후 ‘소’가 되어 아무리 능력을 발휘해도 ‘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는 술에 취했든 안 취했든, 감염이 됐든 안 됐든 배제되고 박멸되어야 할 존재다. 그런데 그 ‘소’가 점점 확대된다. 두 번째 시퀀스처럼, 국가는 다시금 두려움에 떠는 국민을 가둬놓고 불바다를 만들고 나서, 유유히 휘파람을 불 것이다. 뉴스에는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보도가 나갈 뿐이다. 수많은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재난의 원인을 인지하고, 주민을 대피시키고, 재난에 맞서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9·11 사태 이후 국가는 그다지 미덥지 않게 그려진다. <투모로우>(2004)에서 국가는 대피령만 내리고 대책을 마련치 못하며, <우주전쟁>(2005)에서 일반 국민에게 국가의 존재는 미미하다. <미스트>(2008)에선 너무 늦게 도착했고, <눈먼 자들의 도시>(2008)에선 재난이 커지자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군은 구원자로 보이고, 무능하긴 해도 국가의 통치성 자체가 의심받진 않았다. 반면 <크레이지>의 국가는 대단히 유능하다. 다만 국민을 적으로 삼는 게 문제다. 실로 놀라운 인식 변화다. 물론 국가에 의한 바이러스 누출과 주민 학살은 원작의 설정이다. 그러나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국가에 대한 불신’을 담았다고 평가되는 원작에서도 과학자들은 치료제를 찾으려 노력하고, 폭격이라는 ‘최종 해결책’은 고려되기만 할 뿐 실행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첨단 위성기술로 야구장 상황을 감지한 지 이틀 만에 주민을 몰살하고, 폭격 대상 지역을 더 확대하는 ‘아쌀한’ 국가에 대한 인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제국의 몰락, 미국인의 공포 9·11 이후 애국법에 따라 감시와 언론통제가 강화된 미국. 두 군데 동시 전쟁과 부자들에게 감세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재정 파탄에 이른 미국. 예산과 병력 차출로 재난관리에 구멍이 뚫려 인재에 가까운 카트리나 참사를 초래한 미국. 차도 없는 흑인들에게 대피령만 내린 뒤 치안 부재의 악선전을 해대며 늑장 대처한 미국. 걸어서 백인 거주지까지 간 수백 명의 주민들 머리 위로 경찰부대가 총을 쏜 미국. 빈민 거주지를 신도시로 개발하려는 시정부에 의해 흑인들의 80%가 집에 못 돌아간 미국. 금융위기로 집을 빼앗긴 ‘서브프라임’ 국민은 버려두고 천문학적 세금으로 부자 금융가를 구제한 미국. 이러한 국가를 목도한 뒤 인식의 전환이 생긴 게 아닐까? 영화 <괴물>의 ‘삽질’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불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듯이, 자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는 <크레이지>의 국가는 ‘제국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2010년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여실히 드러낸다. 미국이 변하고 있다. 4월8일 개봉. 황진미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