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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살육의 향연, 미술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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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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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되새기며 다시 보는 그림들… 왜 우리나라엔 <게르니카>만한 역작이 없을까

사진/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위)피카소 <한국에서의 대학살>.(가운데)앙드레 마송 <학살1>.(아래)
늘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매체로 인식되어온 미술이라는 단어와 전쟁이라는 무자비하고 처절한 단어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삶과 그 뒷면에 놓인 욕망을 소재로 하는 미술에서 전쟁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까.

살육과 부상 그리고 기아와 참혹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양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역사의 기록이자 동물적 투쟁본능에서 생기는 필연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인본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침략과 투쟁, 살육과 지배를 꿈꾼다.

피카소 그림이 겪은 우여곡절


사진/ 훌리오 곤잘레스 <절규하는 몽세라의 마스크>.(왼쪽)르네 마그리트 <기억>.(오른쪽)
미술은, 화가의 눈은 이러한 모순을 놓치지 않는다. 시대를 읽고 역사를 증언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 미술은 인류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야수성, 폭력성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힘은 사진이나 글보다 더욱 생생했다.

아마도 전쟁의 참상을 가장 명확하게 기록한 그림으로는 역시 피카소(1881∼1972)의 <게르니카>(1937, 스페인 레이나소피아미술관 소장)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라는 조그만 마을을 폭격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흑백의 모노톤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전쟁의 폐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조그만 도시 게르니카는 1937년 4월26일 월요일 프랑코의 명령에 따라 거의 완전히 폭파되고 말았다. 프랑코를 지원한 히틀러가 자랑하던 융커스비행단은 공중폭격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잔인무도한 살육제를 벌였고, 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당했다. 게르니카는 그 끔찍했던 순간을 포착했다. 죽은 아이를 팔에 안은 채 도망가는 어머니, 부상당한 말과 깨진 동물들의 머리, 불길에 휩싸인 집 앞에 넘어져 있는 여인 등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은 이 그림에서 가장 생생하다.

사진/ 드미트리 프리고프 <두개의 수수께끼>.(위)디노 형제의 <지옥>.(아래)
그러나 게르니카가 세상에 나온 지 14년 뒤인 1951년 세상은 또 한번 피카소가 전쟁의 참혹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만들었다. 바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아픈 부분인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에 양민학살이 벌어진 것이었다. 피카소는 이 학살사건을 소재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 파리 피카소미술관 소장)을 그렸다. 역시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시킬 수 있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는 공산당으로부터 상업적 성공에 치중하면서 공산당의 미적 모토인 ‘군중미술’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 그림으로 그런 비난을 잠재웠다.

이 그림은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웃지 못할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왜곡되고 굴곡이 많았던 1970년대, 물감과 크레파스를 생산하던 중소기업이 물감상자의 겉면을 이 그림으로 사용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기관(?)의 압력을 받아 파산한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 해프닝은 한국 현대사의 희화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진/ 호안 미로 <고약한 시대>.(위)이수억 .(아래)
그런데 이 그림을 보다보면 낯익은 또다른 작품이 떠오른다. 바로 프란시스 고야가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군의 시민학살을 고발한 <1808년 5월3일>이라는 작품이다. 자유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시민들의 장렬한 죽음을 그린 고야의 걸작이다.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궁정화가로서의 안온한 삶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른 작품을 하기로 결심했고, 1810년 드디어 <전쟁의 폐해>라는 판화 시리즈에 착수했다. 그는 인간의 우아하고 계몽주의적인 태도 속에 숨어 있는 포악하고 잔혹한 일면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냈다. 이 연작은 지금까지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인간이며 또 죽이는 사람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내며 우리는 전율하게 만들고 있다.

전쟁, 앵포르멜회화를 이끌어내다

고야의 이런 고발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전쟁의 참상을 그리는 영국의 젊은 작가 제이크와 디노 채프먼 형제는 이 고야의 판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패러디하는 설치작업으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의 <거대한 재미>는 자그마한 인형들로 전쟁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전쟁의 현장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옥 Ⅰ-Ⅸ> 같은 작품들은 바로 현대판 <전쟁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에로 <굿바이 베트남>.(위)이쾌대 <군상>.(아래)
동족상잔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전쟁을 겪은 우리 미술계도 물론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이를 고발하는 작품들은 많다. 그 유명한 이쾌대의 <군상>(1948)이 대표적이다.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195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피난지에서의 지난한 삶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며, 변영원의 <반공여혼>(195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전장으로 내몰린 여성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무분별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밖에도 이수억이나 이철이, 김환기와 이중섭, 이응노 등의 작가들이 전쟁의 참혹한 일면을 기록한 작품들을 남긴 이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혹독했던 전쟁의 참화는 한국회화의 흐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몸짓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앵포르멜회화가 시작되면서 한국의 현대미술은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가장 처절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그린 그림 중에 <게르니카>에 버금가는 우리 미술의 역작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한국 미술이 철저하게 자신의 예술적 취향에 봉사하고자 하는 태도와 예술지상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또한 단순하게 시대적인 상황을 소재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술인들이 세상과 현실을 외면하고 은둔하려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에 빠졌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역사를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기능을 스스로 외면한 당시 작가들의 역사의식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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