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영화음악은 스스로 마케팅한다

363
등록 : 2001-06-1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영화의 부속물 넘어 그 자체로 거대한 산업화… O.S.T 제작은 국내서도 필수과정

비디오로 영화를 보다가 주제곡이 나올 때쯤 볼륨을 0으로 낮춰보자. 아무리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알더라도, 인물들의 대사를 이해하더라도, 재미는 뚝 떨어진다. 영화가 주는 감동도 훼손된다. 만약 영화 <접속>의 마지막, 전도연과 한석규가 만나는 장면에서 사라 본의 〈Lover’s Concerto〉가 나오지 않았다면 평범한 남녀의 만남에 그토록 가슴이 뭉클했을까. <타이타닉>에서 〈My Heart Will Go On〉이 흘러나오지 않았더라면 뱃머리에 올라가 두 팔을 벌리는 남녀 주인공을 보면서 “쟤네 왜 저래?”라는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깔아주는’ 배경을 넘어…

오랫동안 관객은 영화음악을 영화의 소도구나 부속품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영화와 음악 사이는 훨씬 긴밀하다. 위에서 들은 예처럼 뇌리 속에 깊이 박힌 영화 속 한 장면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 있어왔다. 영화음악이 ‘배경음악’에 불과했던 60년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남미음악의 애잔한 선율이 장만옥의 걸음걸이에 쓸쓸함을 그림자처럼 걸쳐준 90년대 영화 <화양연화>까지. 때로 영화의 음악은 감동을 깔아주는 ‘배경’을 넘어서 영화보다 더 깊고 오래가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역대 O.S.T 사상 가장 많이 팔린 <보디가드>나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칵테일>처럼 영화보다 오래 기억되는 영화음악들도 많다. 최근 소리없이 극장에서 내려왔지만 사운드트랙 앨범은 여전히 순위권 안에서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나 <코요테 어글리>도 그런 예다. 특히 90년대 이후 대형 팝스타들을 사운드트랙에 대거 끌어들여 일종의 편집음반처럼 O.S.T를 만들어내는 흐름이 생기면서 이제 영화음악은 영화의 부수물이 아니라 영화산업과 손잡는, 그 자체로 거대한 산업이 됐다.


할리우드가 영화음악에서 막대한 상품성을 발견한 지는 벌써 반세기가 다 돼간다. 1955년 <폭력교실>이라는 영화에 삽입됐던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는 음악으로 영화가 빛을 본 첫 성공사례로 꼽힌다. 이 영화로 할리우드는 영화음악이 반드시 ‘깔아주는’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대중음악과 스타들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가 음악을 팔기 위해 영화에 출연했고, 록음악 같은 강렬한 대중음악이 영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영화음악의 산업적 영역에서 분수령이 된 작품은 1977년 개봉한 <토요일 밤의 열기>다. 엘비스나 비틀스 같은 인기 가수가 등장한 영화의 음악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의 O.S.T는 사운드트랙으로서는 최초로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가는 기록을 세웠다. 비지스의 주제곡 〈Stayin’ Alive〉 〈Night Fever〉는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전세계에 디스코음악의 열풍을 불러왔다. 영화사가 아닌 음반사의 치밀한 계산으로 제작된 이 상업적 음악영화의 성공은 기존 영화사들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당시 침체를 면치 못하던 파라마운트사는 <토요일 밤의 열기>에 힌트를 얻어 제작한 <플래시댄스>의 대성공으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났다. 이후로도 <풋루스> <사관과 신사> 등 영화음악에 많은 부분 힘을 얻은 작품을 내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삽입곡 O.S.T의 인기행진

그 이후로도 〈Take My Breath Away〉라는 히트곡을 남긴 <탑건>이나 음악영화 <더티 댄싱> 등이 인기를 모으면서 가수들의 삽입곡이 중심이 되는 영화음악이 큰 인기를 모았다. <죠스> <스타 워즈> 〈ET〉 등을 만든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 등이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스코어링음악, 즉 창작연주음악은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한 시기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에는 한스 짐머 같은 걸출한 음악가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스코어음악도 다시 영화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웬만한 상업영화의 음악들이 스코어 O.S.T와 삽입곡 O.S.T로 나뉘어 발매된다. 연주중심의 창작음악을 한곳에 모으고 다른 음반은 철저히 상업적인 전략으로 스타군단을 모아서 아예 음악소비자층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해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 젊은 관객을 겨냥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이런 전략이 퍼져나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삽입곡 O.S.T 리스트를 보면 가비지, 카디건스, 라디오헤드 등 인기있는 있는 록밴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혹을 느끼는 음반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점차로 <배트맨과 로빈>이나 <고질라> 같은 블록버스터 가족영화까지 확산됐다. 삽입음반 O.S.T에는 영화에 들어 있지 않은 곡들도 “영화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여러 곡 들어 있기 때문에 어거지 상업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많은 음악팬들에게 ‘진귀한’ 편집앨범인 삽입곡 O.S.T의 인기는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다.

충무로가 O.S.T의 상품가치를 발견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았다. 물론 70년대에도 <맨발의 청춘>이나 <어제 내린 비> 같은 영화주제곡들이 인기를 끌었고, 93년에는 <서편제> O.S.T가 영화의 흥행과 함께 성공을 거뒀지만 영화음악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다. <꽃잎>을 만든 원일, <은행나무침대>를 만든 이동준 등 영화음악가라고 일컬을 만한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97년 개봉한 <접속>은 국내 영화음악의 흐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영화 시작단계부터 하나의 독립된 상품으로 O.S.T를 기획하면서 올드팝을 주요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의 O.S.T는 70만장 가까이 팔려나갔다. 이후 O.S.T 제작은 국내영화 마케팅에서도 필수적인 과정이 됐다. 그러나 선곡 중심인 <접속>의 성공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마다 올드팝 중심으로 영화음악이 흘러가고, 음악을 띄우기 위한 작위적인 연출이 남발하기도 했다. <약속>에 삽입된 제시카의 〈Goodbye〉나 <쉬리>에 삽입됐던 〈When I Dream〉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접속> 때와 달리 영화적 맥락과는 그다지 상관없거나 거슬리는 ‘안일한’ 선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들어 영화음악을 고유의 장르로 개척하는 스코어음악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90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원일과 이동준에 이어, <8월의 크리스마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등을 만든 조성우나 <박하사탕> <파이란>을 만든 이재진, <친구>를 만든 최만식 등 실력있는 작곡가들이 뮤직 디렉터라는 직함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신해철, 조동익, 어어부 밴드 등 대중음악인들이 영화판에 들어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올드팝 안일한 선곡’ 비판도

최근 2∼3년 사이 한국 영화음악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외국의 경우 영화의 기획단계부터 작곡가가 참여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러시필름을 가지고 개봉 1∼2주 전에 작곡가의 스튜디오 문을 두드리는 제작자가 많다. 여전히 많은 제작자들에게 음악이 영화 후반작업의 ‘일부’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국영화음악의 질적 도약을 위해서 이처럼 열악한 후반작업 여건은 하루 빨리 개선돼야 할 문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