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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는 폭설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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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4 16:24 수정 : 2010-01-1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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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기 기자
경인년 하얀 호랑이의 첫 호령은 굉장했다. 새해 첫 출근을 하는 날 하늘을 뻥 뚫어버리더니, 쏟아지는 폭설로 이 나라를 실신시켜버렸다. 골목길의 자동차들은 사이좋게 흰 이불을 덮은 채 얼어버렸고, 전철역에 몰려든 직장인들은 사람 더미가 눈 더미보다 무섭다는 걸 깨달았고, 신년 인사로 배달되던 생태 선물세트는 급냉 동태가 되었다. ‘관측 사상 최고의 적설량’이라는 핑계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눈 한 방에 온 나라가 코미디가 되었다.

손발을 꽁꽁 묶인 채 무력감과 갑갑증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한 방의 통쾌함을 선사한 것은 ‘웨이팅 박’의 폭설 리포팅. 그 전말은 온 국민이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자. 어쨌든 갑갑한 네티즌에게 일용할 놀거리를 주어 참으로 감사하다 아니할 수 없다. 더불어 김혜수의 남자, 유해진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가 될 일생일대의 순간을 안타깝게 놓치고 말았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자연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무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세세한 부분에 재미와 풍자를 버무려놓았다. 박대기 기자의 이름과 전자우편 주소가 만들어낸 개그는 사실 그 하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그 하루 동안 이 나라는 아무것도 못하는 ‘대기’ 상태였으니 말이다. 김포공항의 승객들은 그저 ‘웨이팅’이었고, 버스 정류장에 떨고 있던 사람들은 ‘다음 버스 58분 뒤’라는 전광판에 절망을 넘어 체념에 들어갔다.

자 바보가 되었으니, 바보처럼 즐겁게 놀자. 이 재해를 축제로 만드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 청담동의 스키 용자, 신림동의 숏스키 용자의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골목길 곳곳에 만들어진 눈사람들은 다들 어찌나 센스가 넘치던지. 폭설은 저 대륙에서도 벌어졌는데, 중국의 행위예술가는 스스로 눈사람이 되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

그래, 세계에는 또 어떤 ‘폭설 바보’들이 있었을까? 나는 유튜브 검색창에 ‘funny’와 ‘snow’ 두 단어를 넣고 엔터키를 쳐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대기 기자는 양반이었다. 어느 여성 리포터는 폭설 보도를 나갔다가 불도저 모양의 제설차가 치우는 눈을 해일처럼 얻어맞았다. 온 동네 꼬마들이 마구 튀어나와 던지는 눈뭉치에 망신창이가 되면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는 불굴의 기자, 엄청난 속도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스노 튜브에 태클을 당해 트리플 악셀을 돌고 넘어진 뒤에도 끝까지 멘트를 하는 기자. 그 진지한 직업 정신이 더 큰 웃음을 만들어냈다.

자동차 뒤에 보드를 매달고 눈 속을 서핑한다든지, 눈밭에 누워 팔다리를 펄럭거리며 천사의 날개를 만들어내는 등 귀여운 장난기들도 빛났다. 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도 ‘남의 나라 남의 동네’ 이야기니 웃을 만했다. ‘아이스 드라이빙 핀볼’(Ice driving pinball)이라는 동영상은 미끄러지는 길에 차를 댔다가 핀볼처럼 미끄러지고 부딪히면서 멈추지 않는 자동차를 기가 막히게 찍어놨다. 그래 바보가 되었으면 바보처럼 웃자. 골목길 눈 안 치운다고 이웃 간에 주먹질 말고 눈싸움이나 하자.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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