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옛날식 미남의 게으름


여자한테 약하고, 사행심이 있고… ‘투사+지사’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한겨레 김의겸 기자의 매력

794
등록 : 2010-01-14 15:48 수정 : 2010-01-21 16:15

크게 작게

김의겸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미남이었다. 옛날식 미남. 이마와 눈매가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그레고리 펙을 닮았는데 눈이 그보다 컸다. 눈빛이 반짝거렸고 약간 각진 턱선에선 결기와 과단성이 읽혔다. ‘투사+지사’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려대 법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왔다고 했다. 김의겸(46), 지금 <한겨레> 문화부장이다. 나보다 신문사 두 기수 후배로, 19년 전 그를 처음 봤을 때 인상이 그랬다. 그랬는데….

당시에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정권에 항거해 분신자살한 재야 활동가의 유서를 다른 사람이 써줬다고 검찰이 그를 구속하고, 운동권에선 조작이라며 명예를 걸고 맞섰다. 이 사건 재판에 중요한 검찰 쪽 증인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여학생이 어디 있는지 검찰 빼곤 알 수가 없었다. 김의겸은 그때 경찰기자로 이 여학생을 찾아나섰다. 오랜 추적 끝에 그녀를 만나놓고는 별말 없이 사라지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잔뜩 기대했던 당시 캡(경찰기자 팀장)이 김의겸을 깨는 걸 옆에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찾아내느라 생고생했을 텐데, 쩝. 여자한테 꼼짝 못하는 친구구나!’

얼마 뒤 취재차 그와 함께 대전에 출장갔다. 대전의 <한겨레> 지국장 한 명이 김의겸과 감옥 동기였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처음 묻는 말. “너 요즘은 발 씻고 자니?” 김의겸은 감옥에 있는 동안 발을 어지간히 안 씻었던 모양이다. ‘게으른 친구구나!’ 그는 꼬박 2년 반 동안 감옥에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주동했다고 간 건데, 아무리 군부독재라고 하지만 시국사건으로 그렇게 오래 감옥 사는 일도 드물었다. 말이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가 감옥을 오래 산 것도 그의 게으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기자로서 게으른 건 아니다. 기자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적은 팩트를 가지고 포장을 잘해서 후딱 큰 기사를 만들어내는 이와, 팩트가 많이 쌓이기 전에는 좀처럼 기사를 안 쓰되 한번 쓰면 알찬 기사를 내놓는 이가 있다. 후자가 선진국형 기자겠지만, 한국형 언론 풍토에선 누가 더 낫다고 하기도 힘들다. 김의겸은 다분히 후자였다. 남들 같으면 스트레이트 기사 몇 개는 쓸 팩트를 조그만 상자기사 안에 꽉 채워오는 스타일이었다. 나로서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여하튼 그가 갖춘 건 ‘결기와 과단성’이라기보다 꼼꼼함과 신중함이었다. 그의 인상에 대한 내 해석은 틀려만 갔다. 그 결정적인 게….

술에 관한 한 그는 나무랄 데 없다. 술버릇 없고, 선후배 두루 잘 어울린다. 술 얘길 꺼낸 건, 그가 술 마시다 털어놓은 얘기(살면서 사기당했던 일화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남을 잘 믿는다”고 표현했다. 대학생 때 학생회 사무실에, 지방 대학생이라며 한 남자가 찾아와 “지방대학에 학생회를 만들려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했단다. 김의겸이 앞장서서 학생회비에서 당시로서 제법 큰 돈을 빼내 줬는데, 그 남자가 사기꾼이었단다. 그땐 학생운동 차원에서 속았다 치자. 수년 전 집 앞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차 트렁크에서 골프채를 왕창 꺼내며 “명품인데 여차저차해 지금 처리해야만 하니 반값에 사라”고 했단다. 은행 가서 돈까지 찾아 사고 보니 고철값이었단다. 남을 잘 믿는다고? 내 생각엔 이랬다. ‘사행심이 있구나!’

첫인상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에, 그의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반듯하고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 게으르고, 공돈에 혹했다가 사기당하고, 여자에게 꼼짝 못하는 그림을 떠올리면 코믹하기도 하지만 그의 매력은 겸손함이다. 이름에 ‘겸’자가 있어서일까. 그는 기자 생활을 주로 정치부와 사회부를 오가며 했다. 그러다 보면 세상일이 빤하고 지겨워 보이기 십상인데, 그는 냉소적이지 않고 남들 욕도 잘 안 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 결론을 유보한 채 지속적으로 관찰한다. 나처럼 싫증 잘 내는 인간하고 말이 잘 통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꾸준하다. 스스로는 속이 타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안달하지 않는다. <한겨레>도 센세이셔널할 때가 적지 않은데, 김의겸 같은 이가 거기 꾸준히 있는 게 든든하기도 하다.

3년 전 그가 미국에 연수 갔을 때, 놀러갔다. 그가 운전하면서 공항으로 가는데, 길을 몰라 잠시 헤맸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독촉해도, 그는 죽어라고 표지판만 보며 달렸다. 토익 성적도 꽤 좋았다면서 도무지 영어 하기를 꺼렸다. 전에 보니 그는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야만 미국인에게 말을 건넸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드 유 플리즈 텔미 더 웨이….” 그냥 “에어포트?” 해버리면 될 것을. 이걸 반듯하다고 해야 하나,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그의 말. “뭐하러 물어봐? 미국은 표지판이 잘 돼 있단 말야!”


임범 애주가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