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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맨정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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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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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급스럽지만 하도 안 팔려서 판매량을 공개하는 책 ‘한길그레이트북스’ 50권 돌파

사진/ 한길사의 ‘한길그레이트북스’는 상업성이 거의 없음에도 뚝심있게 출판하는 출판사의 고집이 경이로운 대형기획물이다.(박승화 기자)
책 한종 만드는 데 들어가는 예산은 평균 2천만원선. 그렇게 만든 책들이 팔리는 부수는 평균 2400부. 그나마 1천부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년 넘게 걸린다면? 누가 보더라도 적자인 출판기획물이다. 그런데 이런 손해나는 책을 줄기차게 만드는 출판사가 있다. 그것도 1년에 10권씩은 찍어내는 대형 시리즈로. 손해가 뻔하지만 알면서 내는 시리즈다.

“책에 미치지 않고는 낼 수 없는 책”

상업적 견지에서보면 말도 안 되는 이 출판시리즈가 바로 한길사(대표 김언호)가 내는 ‘한길그레이트북스’다. 이 한길그레이트북스가 50권을 돌파했다. 96년 정월에 첫 번째 책 <관념의 모험>(화이트헤드 지음)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5년이 지난 최근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바르크 블로크의 대작 <봉건사회> 두권이 나오면서 꼭 100권의 절반에 이르렀다. 짧은 시간에 이처럼 많은 목록을 거느리게 된 것도 놀라운 점이지만, 상업성이 거의 없는데도 뚝심있게 출판하는 출판사의 고집 자체가 놀라운 대형기획물이다.


출판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한길그레이트북스에 대해 누구나 “책에 미치지 않고는 낼 수 없는 책”이란 점에 동의한다. 사실 한길사는 효자 스테디셀러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대하소설 <혼불>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모두 이 한길그레이트북스에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길사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만들수록 손해인 이 시리즈가 바로 한길사를 대표하는 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판매부수 이상의 이미지 때문에 출판사들이 이른바 ‘잘 팔리지는 않아도 진짜 좋은 책’을 내는 경우는 많지만, 이처럼 엄청난 투자를 해가며 내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길그레이트북스의 등장은 90년대 출판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꼽혔고, 실제 출판현장에서 일하는 출판인들과 전문가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은 책으로 꼽는 책의 위상을 얻었다.

한길그레이트북스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지금 한국 인문학의 현실과 수준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시장이 열악할 대로 열악한 정통 인문학 전문서들을 제대로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전을 제대로 완역하는 시도였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 아는, 하지만 정작 아무도 읽지는 않고 떠들기만 하는 책들, 즉 정약용의 <경세유표>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 고전부터 인도의 고서 <마누법전>이나 <우파니샤드>, 플라톤의 <정치가> 등과 같은 책들을 과감하게 펴낸 것이다. 대학원 이상의 학력자들이나 대학교수들, 그것도 전공자들에게만 필요한 책들이 바로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다.

교수님, 공짜만 좋아하면 대머리 된대요

50권 목록을 살펴보면 그레이트북스의 면면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정말 `그레이트'한 수준이다. 인도철학의 거대한 바탕을 일람할 수 있는 라디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가 4권이고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마누법전>까지 들어가 있다. 에릭 홉스봄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등 지성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 석학의 저작들이 망라돼 있다. 또한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외국의 중요한 저작물을 선보인 점도 돋보인다. ‘일본 지성계의 덴노(천황)’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나 국내에는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양고전인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나 <인간적 자유의 본질> 등도 이 시리즈가 없었다면 쉽게 소개되지 못했을 법한 책들이다.

그러나 실제 이 시리즈의 판매성적은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다. 한길사는 50권 돌파를 맞아 극히 이례적으로 전 시리즈의 판매실적을 스스로 공개했다. 많이 팔려서 판매부수를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경우는 많아도, 이 시리즈처럼 하도 안 팔려서 오기에 가깝게 판매량을 공개한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그 실적을 들여다보면 고급출판물에 대한 우리 독서계의 외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 시리즈의 평균 판매부수는 불과 2400권. 이번에 나온 두권을 뺀 48권의 5년 동안 총판매부수가 1만2천여부다. 1천부를 넘기지 못한 책도 여럿이다. G.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가 580여부, 셸링의 <인간적 자유의 본질 외>가 680여부,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이 710여부, D. 블루어의 <지식과 사회의 상>이 990여부로 1천부도 넘기지 못했다. 보통 일반 단행본 초판인쇄가 1천∼3천부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보다 더 저조할 수는 없는” 결과다. 나머지 책들도 비슷하다. 이익의 <성호사설>도 아슬아슬하게 1천부를 넘겼고, 정약용의 <경세유표> 3권도 나온 지 5년 동안 6천부도 못 넘기는 등 우리 고전들은 특히 판매가 저조한 편이다.

그나마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로 7500여부이고, 그 다음이 역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로 6400여부, 그리고 세 번째가 <우파니샤드> 1권으로 6200여부다.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2천∼4천부로, 1년에 1천부를 넘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각 대학이나 독서관련단체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권장도서 목록에서 한길그레이트북스의 책들이 상당 포함돼 있는 것을 감안하면 판매실적은 놀라울 정도로 바닥을 기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좋은 책, 또는 정말 중요한 책으로 꼽는데도 이처럼 그레이트북스가 팔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 책을 담당하고 있는 한길사의 이승우 차장은 “무엇보다도 한국 학계의 책에 대한 얕은 인식과 풍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원래 그레이트북스 자체가 일반인보다는 교수나 대학원생 등 인문학분야의 전문연구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바로 이들이 책을 사지 않는 탓이라는 것이다. “사실 만들 때부터 1만부씩 팔자고 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 출판환경이 너무나 척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인문학과 여러 학문에 주춧돌이 되는 중요한 책들은 반드시 소개돼야 하고, 그래야 우리의 지적, 정신적 토대도 구축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낸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교수들은 책을 잘 사지 않는다. 교과서에서는 이런 책들이 중요하다고 나오고, 또 그렇게 가르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책이 나오면 꾸준히 전화만 온다. 어느 대학 교수이니 책 좀 보내달라는 전화들뿐이다.”

번역에만 7년이 걸린 책도

애초 10년에 걸쳐 200종 300권을 출판한다는 한길사의 목표는 다소 흔들리고 있다. 판매부수 때문이 아니라 번역에만 최소 3년이 걸리고, 번역 맡을 전공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 수준의 책을 낸다는 방침은 그대로지만 출판 속도가 더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룡 교수가 번역한 인도철학 관련 책들은 번역에만 7년이 걸렸다. 하지만 한길사쪽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이 그레이트북스는 끝까지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번역작업에 들어가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작들도 30여종에 이른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한비자의 <한비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와 칸트의 <판단력비판> 등 수많은 이들이 명작으로 꼽는 중요한 저작들이다. 물론 그 면면으로 볼 때 당분간 그레이트북스 최고의 히트작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전문가들로부터는 절찬을 받지만 실제 판매부수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간극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메워질까. 이 대형시리즈가 앞으로 거둬들일 성적표는 우리 출판·독서문화를 가늠하는 또다른 잣대로 작용할 전망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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