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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디자인이 키워준 추억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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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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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레코드판 시절의 재킷그림을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사운드 디자인전’

레코드판이 LP에서 CD로 바뀔 당시 음악애호가들이 CD에 대한 불만으로 꼽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반 재킷 보는 맛’이 사라진 점이었다. 음반 재킷디자인은 음악을 듣는 데 따라붙는 또다른 재미였다. 음악팬들 가운데에는 재킷디자인을 보고 음반을 사는 경우도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큼직하던 레코드판에서 자그마하게 바뀐 CD의 재킷은 영 그림 보는 맛이 없어졌고, 그래서 마니아들은 불만을 털어놨던 것이다. 지금은 LP가 멸종되면서 그런 불만도 아예 사라졌지만.

영국 가수들의 음반 재킷들만 선봬

이제는 사라진 이 LP레코드판 시절의 재킷디자인을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음반 재킷의 디자인적 측면을 살펴보는 전시회다. 소리와 디자인이 만나는 만큼 전시 이름도 ‘사운드 디자인전’이다. 6월7일부터 7월6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02-2121-0917, www.nabi.or.kr).


이번 전시회는 주한영국문화원이 주최하는 전시로, 흔치 않은 음반 재킷 전시회라는 점에서 일단 눈길을 끈다. 음반 재킷은 가장 대중적인 디자인 작품이다. 또한 급변하는 대중의 기호를 이끌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대중문화의 이미지 취향과 최신의 감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로 선보일 작품들은 CD 등장 이전인 1970∼80년대 작품이 주종으로, 음반 재킷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시기의 것들이다. 80년대 뮤직비디오가 등장해 가수들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특징지우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잡기 이전에는 음반 재킷이 가수의 음악적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음반사와 가수들은 음반 재킷에 무척 신경을 썼고, 디자인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번 전시는 이젠 아련한 추억처럼 흘러간 그 시절의 감성과 향수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다.

주한영국문화원이 주최하는 전시라서 이번 전시에는 영국가수들의 음반 재킷들만을 선보인다. 영국의 디자인회사인 디자이너스 리퍼블릭사가 전시를 디자인했는데 일반 미술 회화작품 전시와는 달리 음반 자체를 비닐봉지에 넣어 벽에 걸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진열하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국 그래픽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유명한 15명의 작가들이 디자인한 음반 5개씩 모두 75장을 전시한다. 이젠 전설처럼 음악사에 기록된 섹스피스톨스부터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의 걸출한 그룹들 그리고 듀란듀란, 최근 영화배우로도 유명한 비욕까지 영국 주요 뮤지션들의 주요 음반들이 나온다. 미술작품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친숙한 가수들과 인기좋았던 음반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음악팬들에겐 흥미로울 듯하다. 또한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소리를 모아 음향작업을 해온 설치작가 김기철씨가 소리 설치작업을 맡아 미술과 음악을 함께 즐기는 분위기를 연출하게 된다.

가수의 얼굴 사진이 주종을 이루는 우리나라 음반과는 달리 영국의 음반은 디자인적 측면을 특히 강조한 편이다. 사실 20세기 초 절대영화를 누렸던 영국의 힘은 이제 모두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유니온 잭이 정상에서 펄럭이는 분야가 바로 대중음악이다. 팝 음악사에서 영국은 거의 미국과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금까지 주도권을 이어오고 있고, 음악적·선구적인 측면에서는 미국 이상으로 세계 팝계를 주도하고 있다. 특히 60년대 비틀스 등 영국 음악의 미국 상륙 등을 일컫는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헤비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록, 펑크 등 영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들은 팝의 흐름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당시 음반들 역시 개성있고 시각적인 디자인으로 음반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도 그런 주요한 것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룹 예스의 경우 특히 음악 못잖게 음반 재킷이 독창적인 그룹으로 이들의 앨범은 판타지풍으로 일관되기로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도 전형적인 예스풍의 재킷을 디자인했던 로저 딘의 작품 <예스 이어스>가 나온다. 저항적인 음악인 펑크를 들고나와 팝계에 일대 변화를 촉발했던 섹스피스톨스의 <갓 세이브 더 퀸>도 지금 다시 보는 재미가 각별한 음반. 제이미 라이드가 디자인한 이 음반 재킷은 사회의 기성문화에 정면으로 도발했던 섹스피스톨스의 음악처럼 영국 권위의 상징인 영국 여왕을 비꼰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더 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등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도 빠지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는 오브리 파웰이 디자인한 <애니멀스>가 출품됐다.

네빌 브로디의 초기 디자인과 만난다

사진/ <마이크로 포니스>를 디자인한 네빌 브로디.
그러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네빌 브로디가 디자인한 카바레 볼테르의 음반 <마이크로 포니스>다. 네빌 브로디는 영국을 넘어서 현재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가운데 한사람으로 디자이너들과 디자인 학도들에게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최고의 스타 디자이너. 뒷날 잡지 <페이스>의 아트디렉터로 명성을 얻게 되는 브로디가 그 이전에 디자인 감각을 담금질했던 작업이 바로 음반 재킷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이 카바레 볼테르의 음반이 바로 그 시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단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시도로 세계 디자인을 주도하는 브로디의 초기 디자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미묘한 형상들이 난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브로디 특유의 감각이 이 음반 재킷에도 잘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다른 음반들도 모두 재킷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것들로 시대에 따른 디자인의 변천을 훑어보는 것도 전시를 보는 또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유행과는 다르고, 어찌보면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음반 재킷과는 다르면서도 디자인에 충실한 영국 음반들의 면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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