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디플로> 한국판 12월호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덕에 은행들은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은행들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힘들었던 위기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양상이다. 다음에도 또다시 이런 위기가 발생할 경우, 은행들은 정부를 ‘볼모’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세르주 알리미 <르 디플로> 프랑스판 발행인은 “이제 은행들의 도산은 교묘하게 유보됐으나, 이번에는 예산 부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각 정부의 공공 예산들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며 “경제위기로 더욱 무거워진 부채 비중이 이번에도 사회복지와 공익사업 폐기의 구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썼다. 방임주의 병영국가, 그들만의 나라인 게다. 그런 나라에서 담론을 지배하는 건 국가다. 종종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적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대중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분할통치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만 난무하기 마련이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 곧 국가동원 체제가 21세기에 요란하게 부활했다. 오경석 한양대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최근 2~3년 새 놀라운 속도로 유행처럼 번지며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된 ‘다문화주의’에서 새마을운동을 떠올렸다. 특집으로 다룬 코펜하겐 기후변화 정상회의 관련 기사에서 리카르도 페트렐라 스위스 USI 건축학교 교수는 ‘시장제일주의’보다 강력한 ‘미국제일주의’의 해악을 통박했다. 페트렐라 교수는 “미국은 그동안 자국의 사회 모델이나 ‘안전’(곧 ‘세계의 안전’)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이나 생활 방식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제국주의적 일방주의 정책을 시행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번엔 다를까? 페트렐라 교수는 비관적이다. 사무실의 일상적 업무가 된 전쟁 이 밖에 언론인 로랑 세콜라·에두아르 플림린은 ‘극단의 20세기’를 지나온 인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마주한 극한의 폭력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폭격을 퍼붓는 곳에서 몇천km나 떨어진 미국 네바다의 크리치 공군기지에서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컴퓨터 자판과 조이스틱을 사용해 무인항공기를 조종한다. 전투원의 최종 행위, 곧 ‘죽음을 안기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쟁은 사무실의 일상적 업무, 게다가 비디오게임이 돼버렸다.” 모니터는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야만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