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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작가주의? 스펙터클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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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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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여름전쟁, <미이라2>에서 <쥬라기공원3>까지

매년 이맘때면 태평양에서 건너오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 높은 불쾌지수를 동반한 무더위와 그 피서용으로 맞춤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다. 극장을 부숴버릴 듯한 스펙터클과 사운드, 할리우드 일급스타들의 총출동, 복잡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단순명료한 판타지의 세계가 여름대작영화의 어김없는 재료이다. 그러니 블록버스터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처음부터 재미와 볼거리의 강도에 맞추는 게 현실적으로 보인다. 형식의 실험정신이나 완성도, 세상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얼마나 엿보이는지 따위를 논하는 진지함은 잠시 접어두자. 올해 공개될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큰 대작이 될 김성수 감독의 <무사>가 할리우드 자본의 전쟁터인 여름을 피해 9월 초로 개봉을 미룬 건 패배주의가 아니라 합리적 상업성의 발로가 아닌가.

이런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보더라도, 하와이에 정박한 거대한 핵항공모함에서 500만달러짜리 시사회 이벤트를 열어가며 지난 6월2일 개봉한 <진주만>은 결핍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더 록> <아마겟돈> 등을 함께 만든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감독 마이클 베이가 또 한번 손잡아 낳은 야심작이지만, 40분가량의 진주만 폭격장면 전후로 너무 오랫동안 눈의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 죽마고우인 레이프(벤 애플렉)와 대니(조시 하트넷)가 간호병 에블린(케이트 베킨세일)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전반부의 기나긴 로맨스는 도무지 애틋하지 않고, 후반부에서 일본에 대한 응징으로 등장하는 도쿄 공습 이야기는 가미가제의 원조가 미국이 아니었나 싶은 궁증금을 잠시 일으키지만 그 단순무식한 애국심 경쟁에 그렇지 않아도 더운 몸의 온도가 한참 더 올라간다. 투하 순간부터 미 군함에 가닿아 폭발할 때까지를 역동적으로 그려낸 폭탄의 시점숏 정도가 블록버스터라는 위신을 살려준다.

<진주만>의 단순무식한 애국심 경쟁


속편 시리즈의 문을 열 <미이라2>는 일단 <진주만>처럼 상영시간이 길다. <진주만>의 173분에 비해 <미이라2>의 130분은 상대적으로 짧지만, 훨씬 경제적이다. 전편처럼 이집트의 이국성과 악마의 부활이라는 소재를 여전히 이어가면서 인디아나 존스류의 모험담을 가세시켰다. 또 실사영화라고 하기엔 껄끄러울 정도로 정신사납게 등장하는 컴퓨터그래픽의 현란함이 볼 만하다. 전편에서 커플을 이룬 오코넬(브랜든 프레이저)과 에블린(레이첼 와이즈)이 영리한 아들을 낳아 새로운 배역을 맡기자, 이들과 맞서 싸울 악한들 역시 지원부대를 찾았다. 부활한 이집트 고대 마법사 이모텝과 그의 반려자 아낙수나문은 죽음의 신 아누비스의 군대를 이끌고 세계를 정복했던 전설적인 마왕 스콜피언 킹과 파트너가 되려고 한다.

또다른 속편 <쥬라기 공원3>은 감독을 갈아치웠다. 1, 2편을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리를 <쥬만지>의 조 존스턴이 차지했는데, ‘대체로 3편은 실패하더라’라는 속설을 어떻게 딛고 일어설지가 관심이다. 그 방안은 아무래도 공룡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더 큰 스피노사우루스를 만들었고, 영리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춰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던 벨로시랩터가 벌이는 인간사냥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전편에서 피로 물들었던 이슬라 소르나 섬에 또다른 탐욕스런 재벌이 위기를 만들어낸다.

스필버그, 〈A.I.〉를 물려받다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서 발을 뺀 스필버그는, <아이즈 와이드 셧>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뜬 위대한 작가 스탠리 큐브릭이 못 다 이룬 과업 〈A.I.〉를 이어받았다. 큐브릭은 20년 전 브라이언 앨디스의 단편소설에서 착상한 아이디어에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보태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고, 자기를 대신할 만한 이 작품의 연출자로 스필버그를 지목했다. 큐브릭이 늘 그랬듯 개봉을 앞둔 이 영화의 구체적 내용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져 있다. <식스 센스>에서 “내 눈에는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라고 호소했던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이번에는 “나를 진짜 소년으로 만들어달라”며 애원한다. 자연재해로 문명이 사라진 먼 미래에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을 상용하게 됐고, 오스먼트는 인공지능에 감정까지 지닌 로봇 데이비드로 출연한다. 한 가정에 입양된 그가 진짜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A.I.〉에 몰리는 관심사는, 작가주의 영화의 아버지 장 뤽 고다르가 경멸해 마지않는 스필버그가 큐브릭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살려낼 것인지, 마법 같은 영상을 만들어내는 스필버그가 어떤 유의 새로운 SF를 보여줄 것인지 등이다.

블록버스터를 언급하면서 작가주의 어쩌구 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 싶은데, 스필버그의 〈A.I.〉에 이어 천재적인 악동 팀 버튼이 1968년작 <혹성탈출>을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 예정이어서 여름 대작 전쟁터는 복잡한 지형도를 그린다. 팀 버튼은 <배트맨> <화성침공> <슬리피 할로우> 등 할리우드영화 속에서도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은 작가주의 감독이다. SF영화는 인류의 미래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가곤 하는데 1968년작 <혹성탈출>은 디스토피아의 전율을 선사한 바 있다. 팀 버튼이 “<혹성탈출>의 리메이크나 속편을 만드는 것에는 흥미가 없고 멋진 신화 혹은 동화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게 흥미롭다”며 착수한 이 작품은 지구가 아닌 21세기의 먼 혹성에 불시착한 우주비행사(마크 월버그)가 인류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다는 설정이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인간권리운동을 펼치는 ‘아름다운’ 침팬지로 등장한다.

이미 명성을 얻은 비디오게임을 영화화한 <파이널 판타지>와 <툼 레이더>에는 은근히 산업적 긴장감이 나돈다. 게임에서 영화로 이어지는 시너지 효과라는 게 아직은 불투명한데다, 완벽한 3D애니메이션을 택한 <파이널 판타지>와 가상캐릭터 라라 크로퍼드의 생명력을 안젤리나 졸리에게 맡긴 실사영화 <툼 레이더> 가운데 어떤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는지가 곧 판명되기 때문이다. 3D 특수효과에 실제 배우가 잠시 끼어든 것 같은 <미이라2>나 포토리얼리즘을 추구한 <파이널 판타지> 같은 첨단 기술이 득세한 세상이지만 전통의 셀애니메이션은 아직 기죽지 않았다. 디즈니 출신의 카젠버그가 제작한 드림웍스의 <슈렉>은 디즈니식 동화를 뒤집은 이야기와 캐릭터로 올 칸영화제 경쟁작에 진출하는 성과를 낳았고, 평단의 지지를 한몸에 얻었다.

프랑스의 혹평과 미국의 호평, <물랑루즈>

그러고보니 칸영화제 개막작이자 경쟁작이었던 <물랑루즈> 역시 할리우드 여름 대작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적 각색에 성공했던 바즈 루어먼 감독은 파리 몽마르트르에 실존하는 클럽 ‘물랑루즈’의 1세기 전으로 돌아가 20세기 팝문화의 결정판을 보여주려는 듯한 뮤지컬 잔치를 벌였다. 니콜 키드먼은 고혹적인 가수 샤틴으로 캉캉춤을 추고, 이원 맥그리거는 사랑에 둔감했던 시인이었다가 앞뒤 못 가리는 정열에 빠져든다. 칸영화제 기간중에 내려진 <물랑루즈>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쪽의 혹평과 미국쪽의 호평으로 완벽히 갈라졌다.

이성욱 기자/ 한겨레 문화부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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