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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핑크색 정책, 배려인가 배제인가

여성만 탈 수 있는 핑크택시 도입 여부 두고
“안전에 도움” “기존 성관념 고착화” 의견 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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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28 14:09 수정 : 2009-10-2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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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는 여성의 젠더색이다. 유아 턱받이부터 할머니들이 입는 카디건까지 여성용품에서 핑크는 기본색이다. 여성을 주제로 한 문화행사도 마찬가지. 유방암 퇴치 운동 ‘핑크리본’, 여성영화제 ‘핑크영화제’ 식으로 핑크는 곧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을 상징한다.

여성문화집단 ‘이프’가 여성 전용 콜택시의 도입을 요구하며 선보인 ‘핑크택시’

2007년부터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서울시도 핑크를 여성의 ‘안전색’으로 삼았다. 어둡고 인적이 드물어 여성을 노리는 범죄가 많은 주차장엔 폐쇄회로털레비전(CCTV)으로 관찰할 수 있는 여성 전용 주차장을 만들었다. 핑크색 선과 여성 픽토그램이 그려진 ‘핑크존’이다. 버스에도 핑크 좌석이 등장했다. 노란색 등받이의 노약자석에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임산부를 위해 등받이를 핑크색으로 칠한 ‘임산부 안전 좌석’이 만들어졌다. 핑크는 이제 ‘여성 전용’을 뜻한다.

시청 앞 ‘딴스홀’에서 펼쳐진 핑크색 축제

지난 10월20일 밤, ‘딴스홀’이 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또 하나의 안전색, 핑크가 눈에 띄었다. 여성문화집단 ‘이프’가 ‘제약 없는 해방과 자유의 밤’을 만들자며 6년째 열고 있는 ‘시청 앞 밤마실’ 행사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폐차를 핑크색과 꽃으로 치장한 ‘핑크택시’. 한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택시는 축제를 찾은 사람들이 앞다퉈 사진에 담아갈 만큼 이색적이었다.

이프는 여성들의 안전한 밤길 귀가를 위해 여성 전용 콜택시 ‘핑크택시’ 도입을 서울시에 요구해왔다. 핑크택시는 여성 운전사가 여성 손님만을 태우는 차로, 이미 러시아·독일·두바이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여성부가 발표한 ‘성평등 지표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남녀가 가장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분야는 밤길 안전이었다. 이프가 핑크택시 도입에 목소리를 높이는 건 이렇듯 불안한 여성들의 밤길을 되찾아주자는 의미다. 축제에 여자친구와 함께 온 송승훈(20)씨는 “안전성이 입증된 여성 전용 택시가 있다면 여자친구가 늦게 집에 들어갈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여성 전용 콜택시의 도입을 찬성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여성들의 밤길 되찾기 문화제 행사를 매년 열고 있다. 지난 7월에도 달빛 아래에서 시위하며 “성폭력 절대 반대” “보호도 완전 반대”를 외쳤다. 여성의 일상을 제한하고 위협하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편견,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차별적 시선을 걷으라는 것이다. ‘핑크택시’ 도입을 요구하는 이프와 달리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제도나 정책보단 인식의 변화를 먼저 짚는다. “치마 길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여성의 옷차림과 성폭력을 연관짓는 잘못된 편견을 지적한다. 일부러 야한 옷을 입고 밤새워 노는 축제판엔 통쾌한 밤길 경험도 덧붙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젊은 남자가 엉덩이를 만지기에 주먹을 날렸습니다. 순간 놈은 얼이 빠져 얼굴을 문지르다 사라지더군요. 이 경험이 빛나는 훈장처럼 뇌리에 박혔습니다. 다음해에 자기방어 훈련을 배웠습니다.”(A씨)

“술에 많이 취한 남자 선배가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끄럽게 해줄까’라더니 치마 속으로 손을 넣더군요. 저는 ‘더 부끄럽게 해줄까, 선배?’라고 말하며 그의 거기를 잡았습니다. 마치 햄스터 같더군요. 무안해하는 그를 남겨두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B씨)

“성차별적 인식 개선이 우선” 목소리도

이 사례들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난해 접수한 ‘즐거운 밤길 경험담’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김두나씨는 “밤길 안전사고는 24시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해자를 엄벌하는 한편 피해자인 여성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분노하고 억압된 시선을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성폭력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도 경기 서남부 지역 연쇄 성폭력 사건 등이 벌어지면서 여성의 밤길은 더 많은 통제와 제약에 갇히게 됐다. 4년 전부터 소리가 되어 나오기 시작한 여성 전용 콜택시 도입 요구가 뜨거워졌다.

핑크색으로 덮인 ‘여성 전용의 어떤 것’은 ‘여성 보호’와 ‘여성 분리’란 두 얼굴을 가졌다. 10월20일 여성 문화집단 ‘이프’는 여성의 안전한 밤길을 요구하며 펼친 ‘시청 앞 밤마실’ 축제(왼쪽)에서 여성 전용 콜택시 도입의 찬성 여부를 물었다.

서울시는 “핑크택시 도입은 실질적으로 어렵다”는 태도다.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운수물류담당관은 “운전사와 손님이 모두 여성인 택시는 범죄 타깃이 될 확률이 높고, 남자 손님은 승차 거부를 해야 하는 운전자에게 그만큼의 손실을 시가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신 서울시는 2007년에 시작한 ‘브랜드 콜택시’가 여성 전용 콜택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브랜드 콜택시는 서울시가 5곳의 택시업체를 선정해 시민이 안심하고 탈 수 있도록 만든 택시 브랜드를 말한다. 여성이 심야 시간(밤 12시~새벽 2시)에 이용할 경우, 출발지와 도착지의 탑승 정보가 손님이 지정한 가족이나 친구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로 제공되는 ‘안심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프 마케팅팀 김지희씨는 “브랜드 콜택시의 실효성을 모니터링해 본 결과 여성운전사가 부족하고, 안심귀가 서비스 문자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여성 전용 콜택시로는 미흡함을 보였다”며 “브랜드 콜택시가 일반 콜택시와 차별성을 보이지 않아 여성 전용 콜택시의 필요성이 더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핑크택시의 도입은 여성계 일부에서도 논란거리다. 두바이의 핑크택시는 여성 보호가 아닌 여성 차별적 시각에서 나왔다는 딜레마를 생각하면, ‘여성 전용’이 ‘여성 분리’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여성학)는 “핑크택시 역시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란 시선을 갖고 있다”며 “여성 전용 택시가 남성과 여성의 벽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만큼 도입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여성 전용 공간에 젠더색인 핑크를 사용하는 것에도 부정적”이라며 “주차장이나 버스 좌석에 보란 듯이 쓴 핑크색은 실효성이 의심되는 전시 행정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 전용이되 분리는 아닌 해법은 어디에

좀더 조심스러운 견해도 있다. 건축사회학자이자 젠더연구가인 차은아씨는 “여성 전용이 필요한 건 도시 공간이 젠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져 불편과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며 “여성 전용의 어떤 것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는 젠더가 가진 관념을 고착시킬 수 있어 위험한 양날의 칼”이라고 말했다.

여성 전용의 의미로 쓰이는 화려한 핑크색. 여성의 안전이 위협받을수록 더 늘어나는 핑크빛엔 보호와 분리라는 두 얼굴이 있다.

여성 택시운전사 박승려씨

“운전사·손님 모두 여자면 안심되죠”

박승려씨
이프의 ‘시청 앞 밤마실’ 행사엔 늘 핑크택시가 서 있다. 실제 핑크색 택시는 없으니 폐차장에서 폐차 직전의 차를 가져다 칠한 거다. 15년 경력의 여성 택시운전사인 박승려(65)씨는 이프 축제 때면 이 택시를 몰고 서울시청 앞 일대를 1시간가량 주행한다. ‘여성 전용 콜택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하는 그는 벌써 3회째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 핑크택시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 현업에 있으니 내가 먼저 홍보한다. 택시에 여자 손님이 탈 때 핑크택시에 대해 꼭 설명한다. 그러면 여자 손님들의 반응은 모두 ‘찬성’ ‘환영’이다.

- 여성 택시운전사를 보는 손님들의 반응은.

= 내 차를 타면 마음 놓고 차에서 잘 수 있겠다며 ‘행운’이라고 한다. 안전하게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실제로는 내릴 때까지 긴장하지 않나. 그래서 나도 일부러 여성 손님을 많이 태운다.

- 핑크택시 도입도 여성들의 안전한 밤길 귀가를 위해서인데.

= 서울시의 브랜드 콜택시가 여성 콜택시로 활용되고 있지만 이를 모르는 여성이 더 많다. 핑크택시가 도입되면 여성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운전사의 인상에 신경쓸 필요도, 승차 거부에 당혹스러워할 필요도 없다.

- 여성 운전사로서도 핑크택시가 필요한가.

= 나도 택시에서 벌어질 수 있는 폭력에 두려울 때가 있다. 운전사와 손님이 모두 여자라면 안심이 되지 않겠나. 굳이 핑크색 택시가 아니어도 여성 전용 콜택시가 생긴다면 나로서도 환영이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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