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김주성, 만리장성을 넘다

361
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가난 딛고 대학농구 최고의 센터로 자리매김… 동아시아대회 대중국전 승리 이끌어

사진/ 다른 대학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중앙대를 선택한 김주성(오른쪽). 그는 ‘중앙대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연합)
대학농구 최고의 센터 김주성(22·205cm·중앙대3)이 오사카 동아시아대회에서 아시아 유일의 NBA선수 왕즈즈(214cm·댈러스)와 ‘움직이는 만리장성’ 야오밍(227cm)을 동시에 상대해 판정승을 거뒀다. 비록 한 경기지만 ‘한국 최고의 NBA급 선수’, ‘지긋지긋한 중국공포증 탈피’ 등 의미가 큰 결과였다. 더구나 부모님의 장애와 가난을 딛고 이뤄낸 성취여서 더욱 의미가 크다.

“부모님, 오히려 자랑스러워요”

99년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때였다. 대학농구연맹전 결승 취재를 위해 잠실학생체육관으로 갔다. 솔직히 경기 취재보다는 기자로 욕심을 내는 취재거리가 따로 있었다. 이미 데스크에도 보고한 상태인지라 꼭 해내고 싶었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김주성 부모님을 직접 뵙게 된 때였다. 서장훈 이후 한국 최고의 센터로 꼽히는 중앙대 김주성. 그가 곱사등이 어머니와 소아마비 장애인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몇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취재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어설픈 접근과 기사화의 욕심이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경기 전 잠깐 김주성과 독대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기자라는 점을 내세워 어렵게 ‘취재신청’을 했다. “부모님이 여기 나와 계신 줄 안다. 꼭 취재를 하고 싶다. 이미 대학 최고의 선수로 부상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다.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없다. 우승하면 부모님과 함께 만나자.” 놀랐다. 김주성의 반응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저, 우리 부모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랑스워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저를 이렇게 잘 키워주셨잖아요. 우승하면 축하해주세요.”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한 순간이었다.

결국 김주성을 앞세운 중앙대는 모처럼 우승했다(최근 3년여 동안 펼쳐지고 있는 중앙대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김주성은 약속대로 경기장 뒤편 주차장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타났다. 두분은 혹시라도 아들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걱정했는지 처음에는 망설였다. 하지만 김주성이 부모님을 양쪽에 세운 채 가족사진 포즈를 취했다. 이 사진은 5월8일 어버이날에 맞춰 신문에 실렸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언젠가 본 70년대 한국영화에 나온 대사다. 김주성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장애에 대한 편견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부모님의 돈벌이가 시원찮았는지 모른다. 몇년을 거슬러올라가 97년의 일이다. 당시 대학농구계에는 역대 최고의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10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초고교급 선수 3명이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주성(부산동아고), 김태완(휘문고·현 한양대), 정훈(낙생고·성균관대)의 순으로 랭킹 1∼3위가 정해졌다. 스카우트 전쟁은 먼저 3월 김주성을 놓고 치열하게 시작됐다. 서울의 모 대학감독이 김주성의 다 쓰러져가는 부산 집을 방문하면서 쓴 차비와 경비가 5천만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김주성은 중앙대와 이미 인연을 맺고 있었다. 한기범, 김유택을 발굴한 정봉섭 중앙대 체육부장이 벌써 3년째 김주성을 후원해온 터였다. 정 부장은 부산에 엄청나게 키가 크고 깡마른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해운대중 3학년에 재학중인 김주성을 찾았다. 말이 대형선수지 200cm에 가까운 키에 체중이 70kg에 불과해 기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 부장은 몇 차례 테스트를 통해 천부적인 운동자질과 농구선수로는 제격인 긴 팔을 눈여겨봤다. 별볼일 없는 육상 높이뛰기 선수였던 김주성은 영남중으로 전학하며 농구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서장훈 ‘엘리트’, 김주성 ‘헝그리’

사진/ 중국의 ‘장대숲’을 제치고 슛을 날리는 김주성. 중국 센터들에게 판정승을 거뒀다.(연합)
무명에 가까운 김주성에게 정 부장은 농구용품, 장학금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나 고교 최고의 센터로 성장한 김주성을 놓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농구로 가장 성공했다는 모 대학감독은 설득이 여의치 않자 1천만원짜리 수표 13장을 김주성의 집에 놓고 갔다. 김주성의 부모는 돈 대신 인간적인 정을 택했다. 수억원의 스카우트비를 포기하고 적은 액수에 중앙대로 진로를 정한 것이다. 말이 쉽지,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도 황금의 유혹에 쉽게 의리를 배신하는데 생활보호대상인 집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97년 4월. 김주성의 중앙대행이 결정난 뒤 부산동아고는 서울에서 열린 한 전국대회에 참가했다. 휘문고와의 예선전. 휘문에는 김태완을 비롯해 초고교급 선수가 즐비했다. 경기는 김주성을 제외하곤 이렇다할 선수가 없는 동아고의 완패였다. 김주성도 김태완의 힘에 밀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경기 뒤 김주성-김태완을 함께 묶어 사진을 찍기 위해 둘을 찾았다. 특유의 넉살을 떨고 있는 김태완은 쉽게 찾았는데 김주성이 보이질 않았다. 물어물어 찾은 결과 화장실 옆 계단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다행히 김주성을 달래 사진을 찍고 더블 인터뷰까지 했다. “오늘 져서 너무 속상합니다. 다음에는 꼭 이길 겁니다.” 울음 섞인 김주성의 각오에서 향후 대선수로의 성장을 예감한 순간이었다.

농구인들은 서장훈(27)과 김주성을 곧잘 비교한다. 서장훈 선수는 ‘국보급’이라는 평을 듣는 한국 최고의 센터.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07cm에 정확한 슈팅, 공부를 했으면 수재가 됐을 것이라는 비상한 머리까지 갖췄다. 휘문고-연세대-SK를 거치며 그가 있는 팀은 항상 정상을 차지했다.

다섯살 밑인 김주성은 서장훈보다 키는 2cm 작지만 발전 가능성면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팔길이가 길어 ‘농구높이’는 서장훈에 밀리지 않는다. 서장훈처럼 영리하지는 않지만 머리도 나쁜 편은 아니다. 운동감각에서 스피드와 유연성은 서장훈보다 월등하다. 아직 미들슛의 정확도나 농구테크닉은 서장훈에게 뒤지지만 연습으로 만회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오사카 동아시아대회 중국 격파 쾌거 뒤 ‘김주성 우위론’이 거세졌다. 서장훈과 김주성의 단순한 비교는 의미가 없다. 아직 둘은 현역선수이고 신만이 아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관점은 흥미롭다. 둘은 각각 전형적인 ‘엘리트’와 ‘헝그리’라는 차이가 있다. 또 이런 둘이 주위의 생각보다는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이다. 서장훈은 모 패션회사의 이사를 지낸 고학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부친 서기춘씨는 190cm).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타고난 신체조건에 운동신경과 머리까지 좋았다. 항상 최고의 길을 걸어왔다. 그만큼 고집도 세고 승부근성도 강하다. 때로는 심판항의와 거침없는 언사로 구설에 오르지만 알고보면 그만큼 폭넓은 대인관계를 갖춘 선수도 드물다. 유머감각도 풍부해 항상 주위의 웃음을 몰고 다닌다.

서장훈의 ‘특별한’ 선물

부산에서 태어난 김주성은 장애인 부모에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제대로 먹이지 못해 항상 말랐다”는 부모의 말처럼 어렵게 운동했다. 말과 미소는 별로 없고 항상 그늘진 표정에 내성적인 성격이다. 지금은 대학생활을 거치며 많이 좋아졌지만 김주성의 기본은 헝그리정신이다. 강한 승부근성도 서장훈의 것과는 다르다. 서장훈이 지기 싫어 하는 성격에서 나온 승부근성이라면 김주성의 승부근성은 삶의 존재 조건 자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적인 대립은 현실과는 무척 다르다. 둘은 친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장훈은 김주성을 후배로 챙기고, 김주성은 서장훈을 존중한다. 함께 대표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였고 서장훈이 김주성에게 자신이 입던 옷을 선물하기도 했다(사이즈가 워낙 커 둘은 옷을 쉽게 구할 수 없다).

서장훈은 “(김주성을) 저하고 자꾸 적대적으로 비교하지 마세요. 프로에 와서 정당한 승부를 통해 서로 발전하면 좋고, 또 그게 한국농구 발전에 도움이 돼잖아요. 둘 다 좋은 선수로 봐주세요”라고 주문한다. 김주성도 “서장훈 선배만큼 되려면 아직 멀었다. 좋은 본보기로 삼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맞장구친다.

유병철/ 스포츠투데이 기자 einer@sportstoday.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