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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소년 책] 턱 괴고 이 책 펼치지 마라

훈계조의 고리타분도 오버액션의 유치함도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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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27 17:32 수정 : 2009-10-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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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권하는 청소년 책 18]

〈영두의 우연한 현실〉
<영두의 우연한 현실>
이현 지음, 사계절 펴냄, 2009년 3월 출간, 9천원, 사계절 1318문고

‘청소년 소설’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독자는 한 체급 낮은 상대를 만난 듯 느긋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쪽 팔로 턱 괴고 이 책을 펼쳤다가는 큰코다칠 확률이 높다. 정체성 혼란, 가족 간 갈등, 성(性)과 연애, 교육 현실의 각박함… 소재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재료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단편집의 표제작인 ‘영두의 우연한 현실’은 기발하다. 모범생 영두는 어느 날 또 다른 자신인 영두가 폭력을 휘두르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두 영두는 서로를 만난 뒤 자신이 여러 개의 우주 속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중우주 이론을 빌려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낸 수작.

‘빨간 신호등’은 섬뜩하다. 청소년 성폭행 문제를 가해자의 시선으로 다룬 이 작품은 잘못된 성 의식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점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평범한 일화를 통해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오답 승리의 희망’은 사랑스럽다. 일명 ‘오승희 사건’을 둘러싼 교사의 탄압, 그에 맞서는 두 주인공의 소박한 연대가 가공되지 않은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청소년에게도 주체 의식이 있고 정치적 견해가 있음을 세상은 왜 모를까. 미친 소 반대 촛불시위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도 청소년들이었는데 말이다.

나머지 단편들도 하나같이 미덥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성인작가가 쓴 청소년소설이 빠지기 쉬운 훈계조 말투의 고리타분함이 없다. 섣불리 10대의 세계로 편입하려다 빚어지는 오버액션의 유치함도 없다. 없어야 할 게 없으니 더더욱 실한 작품이 되었을 수밖에.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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