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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평론가들이여, 조금만 더 쳐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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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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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영화판의 돌출적인 게릴라, <수취인불명> 개봉 앞둔 김기덕 감독

사진/ 놀라운 속도로 새 작품을 선보이는 김기덕 감독은 우리 시대에 가장 논쟁적인 감독 가운데 하나다.(이혜정 기자)
김기덕(41) 감독은 우리 시대의 영화감독군 가운데 가장 돌출적인 존재다. 짧은 가방끈(김 감독이 받은 제도교육은 초등학교가 전부다)이나 충무로 스탭경력이 전무하다는 건 오히려 하찮은 부분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저예산,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다산성, 그리고 극과 극을 오가는 평단의 반응에서 그는 여느 감독과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이다.

흥행 참패를 벗어난 적이 없다

96년, 김 감독의 등장은 그의 데뷔작 제목을 연상시킨다. 평단의 외면과 관객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입성’했다기보다 데뷔작 <악어>처럼 슬그머니 충무로 뭍으로 ‘기어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야생동물보호구역>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작품에 대한 반응도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이듬해 <파란대문>을 발표했고, 1999년에는 <섬>을, 2000년에는 <실제상황>을 선보였다. 그리고 여섯 번째 작품 <수취인불명>이 6월2일 개봉한다. 중·고생이 교과서를 떼듯 그의 작품목록에는 96년부터 해마다 꼬박꼬박 다른 제목이 걸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미술까지 직접 담당한다. 김 감독은 이 엄청난 에너지를 “노느니 이잡는다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일 뿐”이라고 가볍게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작품 구상기간이라는 게 따로 없다. 영화를 찍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니고 편집하는 “짬짬이”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고 한다. 그래서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새로운 작품에 대한 ‘레디-액션’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진/ <섬>
놀라운 사실은 그의 어느 작품도 흥행에서 참패를 겪지 않은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웃으면서 “전 작품의 관객을 다 합쳐도 10만명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의 최고 흥행작은 99년 발표한 <섬>으로 서울에서 3만명의 관객이 보고 갔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충무로라지만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임무’에 가깝다. 아무리 잘 나가던 감독도 한번 가파른 흥행의 비탈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제작사들이 등을 돌리는 게 충무로의 논리고 대자본의 예술, 주류 영화판의 논리이기도 하다. 처음 내놓은 두 작품이 연달아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는 패배를 겪으면서도 다음 작품의 진행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개봉영화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초저예산에 있다. 한쌍의 남녀가 나와서 속닥거리다 끝나는 영화조차 10억원 이상 들어가게 된 최근까지 그는 보통 영화의 마케팅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악어>와 <파란대문>을 만들 때 3억원가량의 예산을 활용한 김 감독에게 8억원을 ‘쏟아부은’ <수취인불명>은 블록버스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하다. 저예산 아래서 당연히 그의 작업은 속전속결로 이뤄진다. 이른바 흥행보증수표라고 할 만한 스타급 연기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저예산 제작방식은 초창기 무명감독 시절부터 지금까지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김 감독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일부러 저예산이나 무명배우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 찾아다니고 스타의 허락을 받아내느라 몇년씩 보증도 되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느니 구할 수 있는 돈으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은가”라는 게 김씨의 지론이다. 그래서 종종 그의 영화는 “없어보인다”,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지만 이에 대해서 그는 “가난한 영화에 가난해보인다는 지적은 무의미하다”고 반격한다.

그러나 김씨에 대한 평가는 게릴라식 영화제작으로 인해 튀는 감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2000년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보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극장 출구를 나서게 만든 감독이 김씨뿐만은 아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을 만든 홍상수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홍 감독이 평단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감을 얻은 반면, 김 감독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인 반응이 뚜렷이 갈린다. 특히 몇몇 여성평론가들은 그를 “증오심에 사로잡힌 사디스트”나 “작품에 여성은 없고 여성성기만 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사실 여성으로서 김기덕의 영화를 보는 것은 더욱 불편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부분 강간이나 매춘을 통해 남성과 관계맺는다. 남성들은 모두 비루한, 다리 밑의 인생들이고 그들은 가해하거나 자해하는 방식으로 다리 위의 세상과 소통한다. 영화의 표현양식도 때로 공포스러울 만큼 위악적이다. 살이 시뻘겋게 발려진 채로 물 속을 떠다니는 물고기나 자신의 성기에 낚싯바늘을 꼽는 여인 등이 등장하는 김씨의 작품에 대한 평과 논란에는 ‘엽기’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귀한 대접

사진/ <수취인불명>
이와 관련해서 최근 조사된 ‘김기덕 영화관객 관람특성 분석’은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수취인불명>을 제작한 LJ필름과 무비스닥이 서울지역의 주요극장과 인터넷을 통해 2천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시행한 이 조사에서 김씨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뚜렷이 갈렸다. 김 감독에게 호의를 표시한 35%의 일반관객은 김기덕 영화의 인상적인 요소를 “인간 이면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꼽으면서 그의 충격적 묘사를 문제삼지 않는 데 비해, 부정적인 관객은 충격적 묘사를 가장 인상적인 요소로 꼽았다. 또한 ‘주제/소재에 대한 거부감’, ‘폭력/선정적 묘사’ 등의 이유로 김기덕의 영화를 싫어하는 응답자 가운데 상당수가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는 김 감독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차가운 시선이 관객과 영화간의 거리를 넓혀놓았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한다.

비평에는 비평가의 자의식과 취향이 녹아들기 때문에 정답이나 오답이 있을 수 없지만 김기덕 감독에 대한 국내의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국내에서 첨예한 찬반논쟁을 일으켰지만 베니스영화제 본선에 올라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섬>을 비롯해,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97년 주요일간지에 ‘난 기자가 싫다’는 다소 원망섞인 팩스를 보낼 만큼 국내 평단을 야속해했던 김기덕 감독은 해외에서 얻은 인정 때문인지, 연륜 때문인지, 이제 국내에서의 비판에도 너그러워졌다. 그는 도리어 “욕하기도 지쳐서 그런지 시큰둥해진 국내의 비판들이 이전만큼 날을 세워서 비판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칭찬이건, 비난이건 그는 깊이 새기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못한 형편이다. <수취인불명>이 개봉하기도 전에 이미 <나쁜 남자>의 전반작업에 여념이 없는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다음 작품,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의 이미지들이 유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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