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동안 흔들림 없이 지탱된 R.E.M 밴드의 록 정신… 한국에서는 왜 홀대받는 것일까
서양의 뮤지션 중에서도 이른바 ‘한국취향’이라고 불리는 가수나 그룹들이 있다. 한국인들에게 유난히 사랑을 받고, 더러는 그들의 활동무대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반응이 좋은 뮤지션들이다. 예를 들어 스콜피언스는 전형적인 한국취향의 그룹이다. 반면 한국에서 유난히 홀대받는 음악인도 있다. 이런 음악인들은 무지하게 많지만 아마 R.E.M은 그 가운데서도 단연 대표적인 그룹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라마다 정서나 대중음악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당연하고, 그 자체로 평가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활동해온 R.E.M이 록음악 전반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한국에서 이들이 받는 무관심은 지나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5집 앨범부터 강한 정치색
R.E.M은 <빌보드>나 <롤링스톤> 같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잡지들이 80∼9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밴드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밴드다. 또한 그들은 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에서도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던 얼터너티브록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얼터너티브록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가장 존경하는 밴드로 꼽았고, 자살하기 직전에 R.E.M의 보컬인 마이클 스타이프와 밤새 통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터너티브록과 R.E.M의 끈을 막연하게 묶어볼 수 있다. 그러나 너바나나 펄잼을 상상하고 R.E.M의 음반을 골랐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R.E.M은 몇년 전 드라마 <애인>에 삽입돼서 국내에서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사랑받았던 〈Everybody Hurts〉를 부른 바로 그 밴드다. 얼터너티브록과 드라마 <애인>이라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독자들뿐이 아니다. 올해로 활동경력이 만 스무해를 넘겼지만 이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가사의한’(mysterious) 밴드 또는 음악으로 평가받는다.
R.E.M의 태동은 1980년 미국 조지아주의 애신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지아대학의 학생이었던 마이클 스타이프와 그가 즐겨다니던 음반가게의 점원이었던 피터 벅(기타)은 자신들의 음악취향이 매우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의기투합했다. 여기에 오랜 친구로 애신즈에서 밴드활동을 하던 마이크 밀즈(베이스)와 빌 베리(드럼)가 합류하면서 R.E.M은 대학가 근처 클럽에서 연주하는 이른바 ‘칼리지록’ 밴드로 활동하게 된다. 81년 이들이 처음으로 낸 싱글 〈Radio Free Europe〉은 지역라디오방송을 타면서 대학생들에게 주목받게 됐고 이를 통해 83년 저예산독립음반사인 IRS에서 첫 번째 정규앨범 〈Murmur〉를 발표했다. 놀라운 사실은, 음반을 냈지만 여전히 동네 클럽에서 연주하고 대학이나 지역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 이 앨범이 그해 <롤링스톤>이 뽑는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사실이다. 83년은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음반이 전세계를 강타한 해다. 〈Every Breath You Take〉라는 명곡을 담은 폴리스의 음반도 이 해에 발표됐다. 비유하자면 미선이밴드나 허벅지밴드가 H.O.T나 조성모를 누르고 가수왕이 된 꼴이었다. 그뒤로 6년 동안 R.E.M은 IRS에서 다섯장의 음반을 내면서 활동했다. 데뷔앨범으로 이미 최고의 훈장을 받았고 해가 갈수록 음반의 상업적 위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지만 여전히 이들은 좁은 밴에 악기와 몸을 싣고 전국의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는 칼리지록 밴드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5집 앨범 〈Document〉 때부터 이들의 노래에서 강한 정치색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스타이프는 노래에서뿐 아니라 공공연히 레이건의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훗날 대선에서는 클린턴의 적극적인 지지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해체될 것”
89년 메이저음반사인 워너로의 이적은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들의 언더그라운드 정신과 비상업적인 사운드를 사랑했던 젊은이들이 메이저음반사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봤던 것도 사실이다. 이적 뒤 처음 낸 〈Green〉의 수록곡 〈Stand〉는 빌보드 차트 10위권 내로 진입했고, 91년 발표한 〈Out of Time〉은 전세계적으로 600만장 이상 팔려나가면서 이듬해 그래미상의 주요부문을 휩쓸어 이들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밴드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메이저로 옮기면서 이들이 상업적으로 변했다는 비난은 다소 억지스럽다. 스타일의 작은 변화는 있었지만 변화는 이전의 앨범에도 있었고, 어느 곡을 들어도 천상 R.E.M의 냄새가 물씬 나는 앨범들이었다. 한 평론가의 말마따나 〈Out of Time〉의 진실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앨범”일 뿐이었다.
음반이 더 많이 팔리거나 대중적인 사랑을 R.E.M만큼 받는 그룹이나 가수는 많지만 R.E.M이 ‘불가사의한’이라는 수사로 평가되고, 얼터너티즈록의 시조로 꼽히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들은 얼터너티브 대표주자들처럼 강렬하지 않다. 연주의 테크닉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질 만큼 기타는 쟁쟁거리고, 포크적인 수수함과 팝적인 밝음 또한 지니고 있다. 때로는 컨트리풍의 단순한 멜로디가 두드러지기도 한다. 마이클 스타이프의 목소리는 전통적인 록가수처럼 파워풀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은 등장 당시 주류음악을 꽉 잡고 있던 하드록이나 헤비메탈, 언더그라운드를 주름잡던 펑크와도 완전히 단절한, 말 그대로 ‘얼터너티브’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R.E.M식’ 사운드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지탱돼고 있다. 이들이 지니는 일관성의 바탕에는 다른 밴드에서는 보기 힘든 멤버간의 깊은 유대감이 깔려 있다.
보통 밴드와 그룹은 혼동되어 사용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두 단어는 뜻이 다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그룹이 각자 독립적인 개인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밴드는 개인으로 분해될 수 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적인 단위다(<얼트문화와 록음악>, 한나래 펴냄). 그리고 R.E.M은 주류음악판에서 이러한 밴드 개념에 들어맞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다. R.E.M의 음반 재킷을 열면 확인할 수 있듯이 앨범의 모든 곡은 네 사람의 공동창작으로 표시돼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그룹들은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그룹 전체를 이끌어가고, 비틀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두 사람으로 카리스마가 나뉘면 많은 경우 붕괴하게 된다. 그러나 R.E.M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스튜디오 안에서 호흡을 맞추면서 곡을 완성해나간다. 녹음기술의 발전으로 파트별 녹음을 분리하는 최근까지 원시적인 공동녹음을 고집해온 것도 R.E.M의 철저한 팀작업방식이다. 슈퍼스타가 된 뒤에도 이들은 인터뷰에서 “네명이 다 모일 때는 호흡이 잘 맞았지만, 한명이라도 빠져나가면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고 말했고 “한 사람이라도 탈퇴한다면 팀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 드러머 빌 베리가 고향의 농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탈퇴를 선언했을 때 이들은 잠시 해체의 기간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년 뒤 드러머의 자리를 비워놓은 채 세 멤버가 모여 다시 R.E.M식으로 새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그 많던 록밴드들은 다 어디로…
최근 R.E.M은 12번째 정규앨범 〈Reveal〉을 선보였다. <타임>의 농담기 섞인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이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아버지벌이 됐지만 여전히 81년 당시의 소년 그대로”다. 음반은 발매되지마자 영국과 아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차트 1위를 석권했고 빌보드 앨범차트에도 6위로 진입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라이브쇼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기높은 〈MTV 언플러그드〉의 20주년 특집 공연에 초청되는 등(물론 단독 공연이다) 불혹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사십이 돼도 여전히 20대 때의 정신으로 음악을 하는 R.E.M을 만나는 것은 흐뭇하지만 한편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씁쓸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80년대 초반 들국화를 비롯해 쏟아져 나온 그 많던 록밴드들은 지금 다 어떻게 됐을까. 두장의 앨범만을 낸 채 시퍼런 감성의 날을 감춘 들국화가 20년 가까이 부르고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듣는 것은 그래서 때로는 고통스럽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R.E.M의 태동은 1980년 미국 조지아주의 애신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지아대학의 학생이었던 마이클 스타이프와 그가 즐겨다니던 음반가게의 점원이었던 피터 벅(기타)은 자신들의 음악취향이 매우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의기투합했다. 여기에 오랜 친구로 애신즈에서 밴드활동을 하던 마이크 밀즈(베이스)와 빌 베리(드럼)가 합류하면서 R.E.M은 대학가 근처 클럽에서 연주하는 이른바 ‘칼리지록’ 밴드로 활동하게 된다. 81년 이들이 처음으로 낸 싱글 〈Radio Free Europe〉은 지역라디오방송을 타면서 대학생들에게 주목받게 됐고 이를 통해 83년 저예산독립음반사인 IRS에서 첫 번째 정규앨범 〈Murmur〉를 발표했다. 놀라운 사실은, 음반을 냈지만 여전히 동네 클럽에서 연주하고 대학이나 지역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 이 앨범이 그해 <롤링스톤>이 뽑는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사실이다. 83년은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음반이 전세계를 강타한 해다. 〈Every Breath You Take〉라는 명곡을 담은 폴리스의 음반도 이 해에 발표됐다. 비유하자면 미선이밴드나 허벅지밴드가 H.O.T나 조성모를 누르고 가수왕이 된 꼴이었다. 그뒤로 6년 동안 R.E.M은 IRS에서 다섯장의 음반을 내면서 활동했다. 데뷔앨범으로 이미 최고의 훈장을 받았고 해가 갈수록 음반의 상업적 위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지만 여전히 이들은 좁은 밴에 악기와 몸을 싣고 전국의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는 칼리지록 밴드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5집 앨범 〈Document〉 때부터 이들의 노래에서 강한 정치색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스타이프는 노래에서뿐 아니라 공공연히 레이건의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훗날 대선에서는 클린턴의 적극적인 지지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해체될 것”

사진/ 20년 동안 활동해온 R.E.M이 최근 발표한 12번째 정규앨범. 발매직후 여러 나라에서 앨범차트를 석권했다.









